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칼립투스 Sep 07. 2020

인생의 바닥을 찍고, 1일차

지금이 바닥인 이유


일요일 아침, 눈을 뜨고는 반사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본다. 벌써 시간이 9시 1분을 가리킨다. 때마침 건너방에서 자던 아들도 뛰어와 왜 이렇게 늦잠을 자게 두었냐고 난리다. 초등 4학년씩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엄마아빠와 함께 하는 보드게임 한 판, 주말 드라이브 한 번을 위해 일분 일초가 아까운 모양이다. 


불과 어제 한 결심인데도, 지금 감정상태가 어떤지 귀기울여 보는건, 무척 어렵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익숙한 불편함이 명치끝을 치고 올라온다. 아차, 무얼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이미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불편함의 정체가, 사실 '초조함'이었다는 것을. 말도 안되는 비약이지만, '지금처럼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 아무도 슬퍼해주는 사람 없이 죽어버리는건 아닐까' 싶은 마음인 것을.


살면서 죽도록 힘들었던 적이 꽤 여러번 있었다. 어릴적 몇년을 외톨이로 지내기도, 우울증에 불면증이 겹쳐 1년 넘게 폐인처럼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지금이 제대로 바닥이다. 


삶의 밑바닥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는걸 인정한다. 신용불량자가 된 것도, 어떤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어찌 보면 지금 난, 액션 영화에서 총알이나 폭탄에 맞아 머리 전체가 날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고는 거리가 멀게 서서히 말라 비틀어져 생명이 꺼져가는, 그런 상태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지금이 바닥이라는건, 사실이면서 동시에 선언이기도 하다. 오늘을 1일로, 단 1 밀리미터씩이라도 매일, 치고 올라가 보겠다는 다짐.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일단 전제해놓고 보자는 식이다. 


100일이 지나면 도달하고 싶은 곳


12년전 엄마가 한참 위암 투병하시는 동안, 랜디 파우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듣고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강의중 가장 마음속에 남았던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장벽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벽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Brick walls are there for a reason. Brick walls are not there to keep us out. They are there to give us a chance to show how badly we want something.) - 랜디 파우시 교수, 마지막 강의 중


강의를 듣던 당시에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는, 장벽을 뚫고 지나갈 힘이 되어줄만큼 내가 절실하게 원하는 무언가를 찾고 싶다. 이게 무슨 유치한 말장난이냐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던 어릴적 내 모습이 그리울 뿐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과, 가장 되고 싶은 사람, 굳이 여러 마디로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잘 통해 함께 뜻을 도모할 사람들을 찾고 싶다. 마흔 중반에 장래 희망 운운하는게 내가 봐도 우습고 바보같은 일이지만, 솔직히 그렇다. 


의미를 찾는 여정의 출발점은


오래 전, 남편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저는 잘 삐지는 사람들하고는 친하게 못 지내요. 친구가 삐지면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예요."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멍청한 말이다. 삐졌다는건 불만이 있다는 뜻이고, 대부분 (특히 여자들은) 못마땅한게 있으면 대화로 풀기를 원하는데, 그땐 어린 마음에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먼저 빌고 들어가는게 무언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렇게 난, 평생동안 누구하고도 두루두루 원만하게 잘 지내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마음이 가지 않아 친해지지 못한 케이스도 있었을 것이고, 상대가 보기에 왠지 나하고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그저 그런 인연에 멈춘 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와중에 혼자 감당하기 힘들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잠시 나와 친해졌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곧바로 멀어진 지인들이 꽤 있었다. 그게 당시에난 무척 기분이 나빴는데, 마치 힘들 때 샌드백으로 쓰임받다가 용도를 다 하고 나면 폐기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불과 십년 전에는 결코 해본 적 없는 생각을 요즘은 부쩍 자주 한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보면, 연애를 하더라도 '사랑받아 마땅한, 이성의 입장에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던데, 하물며 서로를 사랑하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사이도 아닌, 사회 속에서 알게 되어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만남을 이어가기 전에 '자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함께 무언가 일을 해나가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는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듯 바닥에서 다시 올라가기 위한 시작점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나은 버전의 내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가장 보통의 인생을 위하여


내 인생은, 세상 수많은 인생들이 그렇듯, 별 볼일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손끝이 저릿할만큼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생긴다 해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 삶은, 내가 남길 유산은, 그다지 볼품 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삶의 의미는, '나'로 부터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빛나는 단 한 순간을 위해 모든걸 희생한다 해도, 나같은 보통의 인간들은 80 평생 중 찬란한 그 한 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들을 묵묵히, 무엇보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러려면 나라는 인간은 아직 한참 더 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매일 1밀리미터씩의 성장을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낮은 목표라 할지라도, 도전해 보려 한다. 인생의 바닥을 찍고, 어찌 되었든 올라가는 추세선을 그려보기 위해, 나처럼 바닥을 헤매이는 영혼들에게 오늘도 건투를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