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답게 살겠노라고 호기롭게 선언하고는,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실제 그 동안 대체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긴 한 것 같다. 누군가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한 것은 없었으니. 하지만 부끄럽게도 난, 요즘 이따금씩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20년차 직장인. 열한살난 다정한 아들. 가정에 충실하고자 부던히 애쓰는 남편. 매일 출근해서 나름의 밥값을 하게 해주는 소중한 일터. 특별히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비굴할 것도 없는, 무난한 인생인데.
'나'를 찾아 떠난 여정은 왜 (아직까지는) 실패인걸까. 그건 아마도,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인생이 어떤건지 아직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들의 명문대 입학에 인생을 걸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운동과 명상, 여행과 취미로만 채우기엔 '의미'가 필요했다. 결정적으로 난, 천성이 내성적인 탓에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는 한편,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차마 내려놓을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갈팡질팡 헤매이고 있다.
어릴 적 운좋게 들어선 잘 닦인 8차선대로를 시원하게 내달리다가 3년전, 회사를 나오면서 자갈 가득한 시골길에 들어섰다. 더 이상 몸도 마음도 회사에 치여 만신창이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예전에 내가 얼마나 미저러블했는지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왜 예전처럼 커리어를 앞으로 내달리지 못하게 되었는지 불만이 가득해졌다. 나름대로 인내심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보니 난, 한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이전에 비해 열악해진 환경과 결과물을 보며 내가 하는거라곤 분노하고, 주변을 탓하고,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내가 내린 결정의 댓가, 그로 인해 처한 현실에 한참 뒤에서야 눈을 뜨고는, 한탄하며, 좌절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사 이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마주칠 때, 이런 쓸데없는 자존심이 가장 아프게 다친다. 과거가 영광스러운 시절이 되어버린, 이제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그 근처로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다시 일어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펼쳐보려는 시도 자체가 말 그대로 소용 없어 보일 때. 어디서부터 무얼 해야 멘탈이 회복될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깊은 골짜기에 들어선 나머지 길을 잃고 나갈 방향을 잃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찾으려면 그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한달 후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기 힘든 요즘, 5년후 10년후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걸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답은 간단하다. 간단하다는건 복잡하지 않다는 뜻이지, 쉽다는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부터 시도해보려고 한다.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감정이 어떠한지 가만히 귀기울여 보는 것. 그리고, 내가 듣고 싶은 따뜻한 격려 한 마디를 스스로에게 해주는 것. 무엇보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멋있지 않고 모양새 빠져도, 내가 원하는 것에 좀 더 솔직해지는 것. 내가 생각하는 근사한 인생이란, 그냥 나 혼자서만 즐겁게 보내는 마이웨이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존경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어야만 한다는걸, 있는대로 받아들이는 것. 번듯한 조직에서 괜찮은 대우를 받고 명함을 내밀었을 때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 않게 되고 싶은 마음을, 창피해하지 않을 것.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금 내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헛점투성이인 나 자신을 조용히 보듬어주는 것. 몇번의 쪽팔림으로 인생이 망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성공만으로 인생이 모두 살아지는게 아니기에, 아직 나에겐 반평생이 창창하게 남아있음에 위로받을 것.
지난 20년동안 일을 하며 사람들한테 받은 상처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털어내고 나면, 다시 간절히 무언가를 원할 수 있게 되겠지. 아마도 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길 원하는 인생을 선뜻 정의하지 못하는건, 아마도 열심히 일만 하며 살다 얻은 깊은 내상 때문일 것이니. 역설적이지만 과거의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가려면, 무엇보다 예전에 나를 말로, 행동으로 해친 자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거창하게 용서를 하거나 다시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사는 방식이 있었고, 내가 인생을 사는 방식과 잠시 충돌을 일으켰을뿐. 내가 아직까지 마음의 흉터를 부여안고 사는건, 그들 탓이 아니다. 무엇보다 살면서 만난 숱한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들, 배운 것들을 기억하며 좋은 면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의심이 많고, 걱정으로 가득한 나란 사람은 천성이 모순 투성이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번듯한 조직에 속해 있고 싶지만 윗사람들에게 끝없이 갈굼당하는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무얼 하든 중심이 되고 싶지만 사내정치에는 영 젬병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 분위기를 띄우는건 영 소질이 없으면서도 혼자 덩그러니 있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 둘씩 사람들을 찾아 만날 약속을 잡게 된다. 동작과 특히 손짓이 둔하고 느린데 반해, 성급함은 우주 최강이다.
목표로 삼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이루고야 마는 집요한 노력형이었는데, 지난 10년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시작점은 찾은 것 같다. 오늘 내 기분이 어떤지 들여다보고, 그렇게 하루를 매듭짓는 것. 100일 동안만 이렇게 자신을 위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과거의 짐을 비워내고 나면, 조금은 더 맑은 정신으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자신에게,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분들께, 정성을 가득 담아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