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하게 싫어하는 일을 해보고 나서야하고 싶은일이 선명해지는 역설이란
요즘 MZ세대들은 퇴사할 때 '스텔스 이직'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익명으로 어플라이 하거나 원격으로 인터뷰 볼 방법이 많이 생겼기에, '스텔스 미사일'처럼 조용히 새 취직자리를 구한 후 훅 하고 기존 직장에 사표를 던지는 식이다. 10년 전부터 줄곧 이직을 시도해온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다. 여자가 드문 업계에서 오래도록 일하다 보니 예전부터 내가 무언가를 하면 금방 소문이 나게 마련이었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지녔기에 전 직장 레퍼런스가 항상 좋지만은 않았던 탓에 스무스한 이직은 넘사벽이었다.
대학 전공을 고를 때부터 마흔 중반이 된 지금까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무난한 전공을 선택하여, 당시 유행하던 컨설팅회사 취업을 턱걸이로 성공하고는 쭉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이 지옥 같은 요즘에서야, 마치 김서린 안경을 닦아낸 것처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
살면서 크고 작은 거짓말에 많이 속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어릴 적 친구들 장난에 속거나, '전교 1등 하면 네가 원하는 오디오를 사줄게'라는 엄마 말에 속는 등. 그러고 보니 그 시절엔 나름 별명도 많았다. 조롱당한다고 속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대신 난, 이렇게라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친구들이 많은 게 어디야 싶은 마음에 웃어넘기곤 했었다.
그 어떤 거짓말도, 마흔 중반, 원치 않는 자리에 나를 데려다 앉힌 지금의 보스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원하는 팀을 구성하게 자율권을 주고, 사업 성과에 대해 재촉하지 않고 6개월 이내에 분사가 본격화될 것이며, 동료로서 존중해 줄 거라는. 불과 5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모든 말에 대해 현실은 정반대다.
입사 초기 웃으며 그가 말할 때, 기분이 싸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사기 쳐서 J를 데려오긴 했는데, 정말 잘 데려온 거 같아."라고. 그 무렵 이미 절친들에게는 단골로 '사기결혼당한 기분'이라고 이야기할 때였다. 그럼에도 막상 사기 친 당사자가 그렇게 나오니 내가 여기서 언제까지 있을 수 있을까 싶은 현타가 왔다고 할까.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난, 남편 확진으로 자가격리에 들어갔고, 격리 중인 상태에서 큰 조직에 처음 몸 담아본 사람이 흔히 할 수 있는 하찮은 실수들에 호되게 질책당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번 크고 작은 똥을 밟았다. 한편 보스는 올 한 해 장사 압박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자신하던 대어가 흔들거리기 시작하면서, 대놓고 나를 샌드백으로 치기 시작했다.
5년 전쯤 오래 다닌 회사를 나오면서 굳게 다짐했던 것이 있다. "사이코 하고는 다시는 일하지 않아". 그 후로 좋은 기회가 있어도 윗사람 성격에 대한 평판이 안 좋으면 미련 없이 거절해왔다. 지금 자리에 오면서도 윗사람에 대한 평판 조회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고, 한결같이 겸손하고 무난하다는 평을 들었었다.
무얼까. 내가 이제 쉽게 떠나지 못하겠지 싶은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함부로 대하는 이 태도는. 하지도 않은 일에, 있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 나를 탓하고, 본인이 잘못 뿌린 씨앗이 썩어가는걸 온통 나에게 풀어댄다. 싫어하는걸 매일 마주해보니, 원하는 것이 더없이 절실해진다. 나를 존중하는 조직, 내가 잘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역할,
일의 끝맺음이 아닌, 시작을 앞두고 사표를 던진 적이 평생 없기에, 이번은 무척이나 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건 참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 정도 쌓아놓은 것은 있으니. 여기서 보스의 감정적 학대를 견디며 일 년을 더 있다 한들, 내 인생에, 내 커리어에 도움 될 것이 없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무쇠처럼 단단히, 온몸으로 가드를 세우고,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