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
내가 이네후나야에서 묵은 숙소는 이 지역의 전통적인 수상 가옥인 ‘후나야’를 여관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사실 이 지역의 이름은 ‘이네’가 맞고, 이‘후나야’가 워낙 줄지어 많이 있는 곳이라 ‘이네후나야’라고 불린다. 후나야의 1층은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그 말은 내가 지금 바다 위에 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조용한 밤이 오고 이불속에 누워 눈을 감으면 파도 위에 있는 듯 물소리가 가까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낮에 아무리 바다에 가까이 가서 그 소리를 들어보아도, 아니 물속에 들어가 본다고 하더라도 왠지 고요한 밤에 물가에 누워 듣는 그 소리만큼 가까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목조주택의 아주 얇아 보이던 창은 그 바닷소리를 더 가까이 귀 옆까지 끌어와 들려주었다.
어릴 적 여름날이면 목포 이모네 집에 놀러 가 소라가 구워질 때까지 평상에 누워 기다렸다. 그 밤이 떠올랐다. 그때 눈을 감으면 파도 소리가 이렇게 들렸었지. 눈을 감으니 이곳이 바다. 이모네 집 평상. 나는 열 살 난 어린아이로 자꾸만 시간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밤새 어딘가로 흘러 다니다가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반투명한 창 너머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떠 방 안에 조그맣게 나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문을 드르륵 여니 발 밑으로 고요하게 제자리에서 반짝이는 물결들이 보였다. 관광객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 바다는 평화로웠다. 받아먹을 간식이 없다는 걸 아는 갈매기들도 하릴없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닐 뿐 날아오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밀려오기 전에 마을 산책을 하고 싶어졌다.
마을 앞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는 보증금만 내면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었다. 해풍을 많이 맞아서인지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것 같은 자전거 하나를 빌려 구경을 시작했다. 내게는 일종의 용기였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자전거는 거의 타본 일이 없을뿐더러, 겁이 많아 공원의 자전거 전용로라면 모를까 일반 도로를 달리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던 자전거가 점차 수평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전날은 힘들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집 사이사이 좁은 빈틈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 액자의 모양만큼이나 다양해 자꾸 더 먼 곳까지 페달을 밟게 했다.
이 동네를 달리다 보니 곳곳에 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위쪽에 절이 있다는 푯말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계단을 올랐다. 큰 건물하나 없는 소담한 마을이라 몇 계단 오르지 않았음에도 뒤돌아보면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모든 지붕이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말 멋진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발길을 재촉하던 중 후다닥 나를 피해 도망가는 사슴과 마주쳤다. 한 마리는 모습을 감추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당당히 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거, 더 이상은 오르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듯 단호한 표정과 몸짓으로 녀석은 길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대치상태로 서 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서 제 위치로 돌아갔다. 위로 올라가 더 멋진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사슴을 불편하게까지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절 구경을 포기하고 내려와 자전거에 걸터앉아 커피 마실 곳을 찾았다. 이곳의 유명한 카페는 11시가 넘어야 문을 열었다. 그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문을 연 꽤 멀리 있는 카페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카페 바로 옆에는 공사가 한창이라 소음이 심했는데, 한 중국인 아저씨는 그 바로 옆에 의자를 내놓고는 세상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전거를 주차하며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커피를 마시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여기 커피 참 맛있어 - 잘 찾아왔네.”
라고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공사 소음 따위는 전혀 그의 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음을 피해 카페 실내로 들어가 푸딩 하나와 커피를 시키고는 일기장을 열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기대 이상의 맛이었던 커피를 마시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난 너무나 모든 게 완벽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게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날 결국은 완벽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어가는 건 이것일 것이다.
인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대충 사는 법 알기.
특별한 일이 없어도 즐기고,
엄청 좋지 않아도 좋아하고,
잘 쓰지 않아도 그냥 쓰고,
시간이 여유롭지 않더라도 그냥 하자.
그런 것들이 쌓여 나를 만들 테니까.
대단한 것들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은 일들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해내가는 것이니까.
돌아가는 길에는 해풍 맞아 삐걱거리는 자전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사장 옆에 앉아 부처처럼 여유롭게 웃고 있던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