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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ug 23. 2024

날아가버리지 않는 기쁨

09. 도시로 돌아오다


도시로 돌아왔다.

여행을 갔다가 집 앞 정류장에 다다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교토역에 내리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처음 우산을 샀던 그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고 짐을 맡겨둔 채 떠났던 호텔로 향했다. 다시 익숙한 좁은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 씻은 뒤, 밀린 빨래거리와 저녁밥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 호텔은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방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작긴 하지만, 공용 시설은 훌륭하다. 부지런하다면 요리할 수 있는 주방도 갖춰져 있고 (물론 나는 끓는 물을 얻는 것 말고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 코인 세탁기와 건조기도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다. 저녁에 돌아다니기 겁나는 나 같은 작은 심장의 여행객들을 위해 한 잔 할 수 있는 작은 바도 있고, 로비에 있는 도서관에서는 저녁 8시부터 30분에 한편씩 단편 영화를 상영해 준다.


바닷바람에 한껏 취해있는 옷들을 코인 세탁기에 넣어두고 나는 8시 영화를 기다렸다. 15분짜리 단편 영화라 영화가 끝나고 옷을 찾으면 딱이었다.


오늘의 영화는 광대 이야기였다. 이 광대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하얀 얼굴 위로 살색의 분장을 했다. 남들과 섞이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다른 것이 되어보고자 애써왔는지 모른다.


스물몇 살 언저리부터 친한 친구 세 명이서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하는 일이 있다.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을 몇 가지 적는 것이다.


십 년 가까이 나는 늘 ‘잘 꾸미고 다니기, 화장하고 다니기’를 적어 냈지만 그녀들은 (아니 실은 나도) 한 번도 믿어주지 않았다. 역시 그 다짐을 지켜낸 해는 역사 속에 없었다. 혹자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내가 이 다짐을 지킬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가장 짙은 특성에서 비롯된다. 예민함이다. 나는 모든 감각기관이 굉장히 예민하다. 시력, 청력은 물론 후각과 촉각마저 매우 곤두서있다.


1. 향수 냄새를 잘 맡지 못해 백화점 1층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시향용 종이를 나눠줄 때면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피해 다닌다.

2. 내 머리스타일이 늘 단발인 것은 긴 머리를 묶으면 두피가 늘 부어오르기 때문이다.

3. 얼굴 위로 한 겹 이상의 화장이 올라가는 것도 잘 버티지 못한다.

4. 늘 품이 여유롭고 부드럽고 얇은 옷만 찾게 된다. 조금만 두꺼워도 머리가 아프고 조금만 목에 닿으면 참지 못할 정도로 답답해지기 때문에.


멋 부리기에는 참 최악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잘 차려입고 정갈한 모습의 멋쟁이들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에 나도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란 착각 속에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서른넷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은 나답지 않다는 것이다.

나다운 것이 무엇일까?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걸까?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자연스레 내게서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가?

그 마음이 내게서 근원 한 것이 맞는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진짜 내 모습을 키워나갈 때 나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기쁨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진짜 기쁨은 마음에 잔잔히 가라앉는다.

날아가버리지 않고 몸 안을 천천히 간지럽힌다.




환하던 도서관이 암전 되었고 곧 스크린이 올라가며 불이 켜졌다. 나는 세탁기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 바다 냄새를 털어버리고 나온 옷가지들을 살펴보았다. 이 얇은 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탔을 때 바람에 시원하게 휘날리던 그 느낌을 떠올리니 몸 안에 무언가가 몽글몽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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