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좋아하는 공간들
나는 어쩌다 보니 12년째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
미술대학에 가고 싶어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리던 학생시절을 지나,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 방황하던 이십 대 초중반을 지나, 지금의 나는 더 나아가고 깊어졌다기엔 애매한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내가 존경하는 인생 선배는 늘 입버릇처럼 한 가지 일을 10년은 해봐야 조금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일을 10년 넘게 했지만 그런 멋진 깨달음에 도달하지는 못한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일을 할수록 ‘디자인이 그렇게 중요한가? 남들은 신경도 안 쓸 텐데..’ 하는 꼬여버린 마음만 가득 해질 뿐이었다.
일박에 오만 원 하던 교토역 앞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힙한 가게들이 모여있는 동네 그 중심에 있는 에이스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가격은 열 배 가까이 뛰었지만 남편이 머무는 짧은 시간이니 좋은 곳에 가고 싶었다.
교토에 있는 에이스호텔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단 재미있었다, 인상 깊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사진 찍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예쁜 카페, 멋진 건축물들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여기가 거기 같고, 이게 저것 같은 비슷비슷한 ‘잘 된’ 디자인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잘 된 디자인이란 몇 가지 형태 혹은 브랜드로 정리되어 있는 듯하고, 소위 ‘취향 좋은’ 사람들이 권유하는 것들은 다 똑같은 브랜드뿐일 때도 많다. 나는 그런 것들에 회의적인 탓에 더욱더 내 직업을 팔짱 낀 채 꼬아보고 있었을 수 있다.
에이스 호텔 속 디자인은 그런 내게 순수한 기쁨을 주었다. 내가 얼마나 시각적 즐거움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다시금 일깨워주기도 했다.
긴 터널과도 같은 통로를 지나고 나면 호텔 건물로 넘어가는 정원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연스레 이어주는 산책로와 같은 이 길은 교토에 왔다면 어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길들과 맥을 함께 한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야 만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이 나서 있지 않고 늘 찾아내야만 모습을 보여주는 교토의 아름다움들과 닮아 있는 듯하다.
나무를 깎아 만든듯한 사이니지, 룸에 걸려 있는 사이노 유로키의 오리지널 작업들, 엘리베이터 각 층의 버튼이 색색깔로 다른 것까지.
교토스러움이 무엇인지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겠지만, 누구든 이 호텔을 경험한다면 ‘교토스럽다!’는 감탄이 터져 나오고 말 것이다. 그만큼 정말 지역을 잘 담아내고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내가 교토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독 제 감각대로 만든 공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 취향의 공간들이라고 묶어 소개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에이스호텔처럼 고급 호텔인 곳도 있고, 조그마한 오니기리집도 있으며, 디자인이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은 날 것 그대로의 야끼소바집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공통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취향은 그렇게 올곧지도 않고 명확하지도 못하구나 싶어 속상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은 없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하지만 꿰어볼 수나 있을까 싶었던 나의 소중한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그 다운 것들이었다.
척하지 않는 것.
다른 무엇이 되려 하거나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흘러나오는 기운만이 가득한 것들.
특별해 보이지 않을지언정 애써 보이지 않는 것.
내가 사랑하는 디자인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직장을 사랑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사랑하는 부분만은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 10년은 또 더 해봐야 하니까.
그 선배는 말씀하셨다.
20년은 해 보아야 잘하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