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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Sep 08. 2024

소쿠리에 담긴 와인

12. 여름을 걷다.


6월 둘째 주.

이곳의 날씨는 선명히 변해가고 있었다.

첫 주에는 반팔과 반바지뿐인 짐가방이 무색할 만큼 찬 바람이 연신 불어 도통 어깨를 활짝 펼 수가 없는 날씨였는데, 둘째 주가 되니 해와 우리 사이 몇 겹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여름이 무섭게 세력을 확장시켜가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날이 더워진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다면 여기저기 걸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들어가겠지만, 더위에 지친 날은 그저 눈앞에 아이스커피만 보였다 하면 좀비처럼 그곳으로 이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날도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고 땀을 흘리며 플리마켓까지 구경하고 나니 에어컨이 나오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묘-한 분위기의 { 이곳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비스트로랄까, 카페랄까.. } 공간으로 들어섰다. 유일한 손님은 할아버지 두 분이셨고, 함바그 스테이크를 드신 듯했는데, 놀랍게도 그 조그만 함바그 스테이크가 반 넘게 남아있었다. 연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내는 모습 (입 바깥뿐 아니라 안까지 씻어내고 싶은 듯 박박 닦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에서 물론 싸늘함을 느꼈지만, 두 시간여 만에 느끼는 에어컨 바람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선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았다. 각종 만화를 편집해 만들어낸 특이한 메뉴판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레몬 파스타라던가.. 하는 메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장님은 자꾸만 이따가 주문을 받겠다고 했고, 다행히 그 사이 더운 기운이 사라지고 제정신이 돌아온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곳 밖으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 이건 아니었던 것 같아.’

라는 말을 반복하며 조금 더 걷자 시야에 조그만 가게가 하나 들어왔다. 간판에는 빵과 와인 그림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테라스 자리라고 말하기에도 좀 민망한 가게 밖에 있는 벤치 한켠에 앉은 사람들이 먹고 있던 화이트 와인과 크로와상을 보고 특이한 조합이다 싶어 관심이 갔다. 생각해 보면 유럽에서는 특이한 조합은 아닐 텐데 아무래도 우리 문화권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와인을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잘 없으니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문을 열고 들어간 작은 가게에 좌석은 3-4개뿐이었고 이미 만석이었다. 밖에서 기다려야겠다 싶은 찰나 서서 먹을 수 있는 바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서서 금방 먹고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자리를 잡았다. 바 밑에 있는 가방걸이에 가방을 걸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그곳에서 레몬 파스타를 먹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정도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자매로 보이는 사장님들은 이 작은 가게에서 직접 빵도 굽는듯했다. 트레이에 놓인 투박한 모양의 빵에서 풍기는 빵냄새와, 얼음 가득 담긴 소쿠리에 담긴 와인들이 기대감을 높였다. 일본어가 빽빽이 써진 메뉴판에 번역기를 돌려 겨우 해석한  <오늘의 생선 샌드위치>와, 소쿠리에 담긴 와인 중 - 언제나 그렇듯 맛은 잘 모르니, 라벨이 마음에 드는 병으로 골라 - 한 잔 부탁했다.


연어가 아닌 생선을 빵 위에 올려 먹는 경험은 아주 생소했는데, 예상외로 엄청나게 맛있었다. 폭신한 빵과 부드러운 생선회, 루꼴라, 이름 모를 소스와 올리브오일. 입안에 한가득 찬 샌드위치를 시원한 와인 한 모금으로 넘겨내고 나니 더운 여름날씨가 이 완벽한 맛의 일부로 느껴져 감사할 지경이었다.


가게를 사랑하는 것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사장님의 표정도, 바자리에 서서 와인 한잔을 마시며 사장님과 몇 마디 편히 나누며 웃다가는 금세 사라지는 동네 단골들이 가득한 분위기도 좋았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가게가 있다면 오며 가며 마음 둘 곳이 하나 있어 얼마나 좋을까 시샘이 날 정도로 다정함이 가득해 보이는 곳이었다.


간단히 요기를 채우고 나온 나는 카모강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이곳과 한 데 섞여 즐기는 사람들이 문득 부러워졌다. 용기를 내 잠시 신발을 벗고 처음으로 카모강에 들어가 보았다. 온몸이 쭈뼛 설 정도로 시원했다. 그동안 여름날 교토를 드나들던 시간들 속 왜 이 선물을 즐기지 않았지? 억울할 만큼 완벽한 순간이었다. 인간이란 참 단순하다. 물길에 발을 담그는 것 만으로 이렇게 금방 웃음이 나다니 말이다. 발은 시원하고 햇볕 받은 돌은 따뜻하고 눈앞에는 어느 하나 막힌 것 없이 푸르기만 하니 더 바랄 것이 없다.


한 살 먹을수록 생명의 소리가 밀도 높게 차오르는 여름날이 좋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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