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자신이 살던 곳을 단 한차례도 떠나 보지 않고 살다가 명이 다되어 가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여행을 다니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며 넘치는 방랑벽을 가지고 평생을 돌아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차로, 비행기로 가족들을 만나러 가고 아니면 모처럼 길게 쓸 수 있는 휴가를 이용해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도로는 벌써 꽉 막혔고 공항은 난장판이다.
우리 가족도 연휴가 있을 때면 숙제를 하듯이 꼭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이번 연휴에는 집에 있기로 했다.
여행을 가지 않으니 그동안 다니던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여행취향은 어느 쪽인지.
부먹파인지.. 찍먹파 인지를 가르는 것처럼..
나는 지치고 쉬고 싶어서 여행을 갈 때는 갔던 곳을 또 가는 것이 좋다.
한번 가보았던, 아니면 여러 번 갔었던 여행지를 가기 전에 드는 푸근한 설레는 감정이 너무 좋다.
지난번에 갔을 때 맛나 보였으나 들르지 못했던 베이커리를 들를 생각에 신이 나고, 하이킹 도중 나타난 양갈래길에서 선택받지 못했던 다른 길을 걸어볼 생각에 또 신이 나고, 자잘한 예쁜 물건을 팔던 가게에 있었던 가게주인의 골든리트리버 강아지의 순하디 순한 눈을 한 번 더 볼 생각에 신이 나서는, 남편에게 그 강아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 집에서 살게 하나도 없어도 무조건 뭐라도 사야 한다며 들뜬 마음에 목소리가 커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반복되는 일상 앞에서 '정말 지루하다'며 더는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어야 할 때는 내발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 가야 한다.
그곳이 다른 언어를 쓰는 곳이면 까막눈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레는 감정은 더욱 커지고 유명한 볼거리를 놓칠세라 계획을 촘촘하게 짜며 욕심을 부리다가 가기 전에 더 지쳐버리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땅에 다다랐을 때 처음 맡아보는 그곳의 공기를 생각하면 갑자기 설렘의 영양주사를 맞은 것처럼 기운이 난다.
언젠가 파리여행을 위해 엘에이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밟기 위해 에어 프랑스 항공사 앞에 줄을 섰었다.
아직 프랑스로 떠나지도 않았는데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영어는 한마디도 안 하고 프랑스어만 하는 것을 들으며(모두들 엘에이 여행을 마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벌써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하며 설레는 마음에 빙그레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갔던 곳을 또 갈 때 마음속에서 이는 기쁨이 더 큰 것을 보면 나는 '간데 또 가' 파인 것 같다.(혹시 이 개그를 아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의 이름은? 깐데 또 까!! 나이 들키셨습니다 ^^)

이번 주 목요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이고 보통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연휴이니 이번 주 월, 화, 수 휴가를 내면 지난주 주말부터 합세해 거의 열흘간의 휴가를 만끽할 수 있다.
해외여행도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다.
모두들 연휴 잘 보내라며 인사말 끝에 '이번에 어디 가? 를 꼭 덧붙인다.
아이들이 모두 크고 나니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왔고 이제야 숨 쉬듯 조용히 쉬는 시간의 묘미를 알 것 같다.
모두가 떠난 도시를 지키며 있는 기분도 괜찮다.
같은 공기인데 연휴의 공기는 다르다.
아래쪽에 뭉근하게 깔려 있으면서 바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연휴의 공기를 가만히 바라보면 이런 글자가 보이는 것 같다. '아무 할 일 없음'
나는 그저 연휴의 공기 속에서 두둥실 떠서 가만히 흘러 다닌다.
매일의 시간을 내가 주도했다면 연휴의 시간은 연휴가 주도한다.
나는 그냥 연휴가 이쪽으로 데리고 가면 갔다가 저쪽에서 내려주면 그곳에서 가만히 머문다.
자라고 하면 자고 일어나라고 하면 느리게 일어나 천천히 움직인다.
연휴의 공기는 절대로 빨리 움직이라며 나를 밀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움직였다가 연휴에게 눈흘김을 받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서 손에 잡지 못했던 책을 펴서 천천히 읽는다.
잔잔한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 놓으니 글의 감동이 몇 배로 다가오고 작가의 품에 안겨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눈이 피로해지면 눈을 살짝 감고 가만히 있는다.
잠이 들면.. 들게 둔다.
해가 지기 전 하늘이 잘 익은 홍시 색깔로 물들었을 때 운동화를 신고 얇은 점퍼를 걸치고 동네산책을 나선다.
벌써 집단장 크리스마스 장식을 끝낸 부지런한 사람들의 집을 보며 감탄을 한다.
'이걸 언제 다했대..' 하면서
하루 종일 별로 움직이지 않은 탓에 막대기처럼 뻣뻣해진 몸에 걸음으로 리듬을 주어 기름칠을 조금 해준다.
저녁식사로 며칠 전 만들어둔 냉장고에 있는 카레를 데워 간단히 먹는다.
조금 유치한 것도 같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한인타운에 나갔다가 파리바케트에서 사 온 녹차맛 롤케이크를 한쪽 잘라먹으며 차가운 오렌지주스를 홀짝홀짝 마신다.
눈을 들어 연휴의 공기를 슬쩍 보니 아직도 이렇게 써있다.
'아무 할 일 없음'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녀의 책 '매일이 여행'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운이 넘칠 때는 애정도 넘친다'
참 맞는 말이다.
피곤하면 뾰족해져서 별것도 아닌 말에 기분이 상하고 아무것도 아닌 옆 사람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
목소리는 저음으로 깔리고 아이들에게는 전보다 더 엄격해지며, 누군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이 느려진다.
내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입 모양은 아마 알파벳 U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리라.
이번 연휴가 끝나고 나면 나는 연휴가 준 달콤한 휴식으로 기운이 뻗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애정을 넘치도록 줄 수 있을 것 같다.
집에서 쉬길 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