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블루의 라면단상

by 미스블루

언젠가 꼭 한 번은 라면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이런 생각은 꼭 라면을 먹으면서 한다.

짭짤한 국물에 담긴 꼬불한 면발을 먹으며 나는 앞에 앉아 함께 라면을 먹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내 머릿속은 이미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서론부터 시작해서 본론으로 들어가며 내가 알고 있는 온갖 라면에 얽힌 에피소드를 머릿속에서 글로 풀어내느라 침묵으로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다.

누가 보면 '몹시 삐졌나?' 하며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그만큼 라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면을 먹으며 머릿속으로 이미 작문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또한 배가 불렀기 때문에, 나는 노트북을 여는 대신 소파로 몸을 첨벙 던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이 상황에 기똥차게 들어맞는다.

누군가에게 내가 라면을 다 먹고 난 다음에 글을 써줄게라고 약속을 했다면 나는 세상천지에서 가장 강력한 양치기 소년이 되었음을 선언할 수 있다. (김칫국부터 들이키자면 나의 이런 점 때문에 혹시라도 출판사에서 계약을 맺자고 해도 몹시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잘 아니까..)


우리 집 부엌에서 가장 편안하게 열 수 있는 넉넉한 서랍이 있다.

그 서랍 속에 나는 나와 식구들이 좋아하는 라면을 종류별로 구비해 두었다.

라면을 가장 초라하고 불편한 자리에 배치할 수는 없다.

라면을 먹고 싶을 때 스르륵 열어서 한눈에 라면의 종류를 빠르게 스캔할 수 있도록 말이다.

면발이 굵은 라면부터 얇은 라면, 몹시 매운 라면과 담백한 라면, 짜장라면과 시원한 라면까지..

나는 보통 열흘에 한번 정도 라면을 먹는다.

가장 피곤한 날.. 불안수치가 가장 극에 달한 날.. 스케줄이 별로 없어서 뛸뜻이 기쁜 날.. 그런 날들에 라면은 나와 함께 그 자리에 있어주며 때로는 함께 파티를, 때로는 눈물을 닦아준다.

그렇게 라면을 먹고 나면 격했던 마음들이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따뜻한 국물은 마음속에서 요동치던 거센 바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얌전히 만들어주고, 파마머리를 한 면발들은 포만감을 주어 날카롭게 뻗쳐있던 신경들을 무디게 만들어 준다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라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국민식량이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부터 그저 라면의 맛이 좋아서 먹는 사람들까지.. 또 각자가 지니고 있는 라면에 대한 추억과 사연들...'라면 먹고 갈래?'라는 유명한 플러팅 메시지까지..

'라면'이라는 음식은 '쌀' 다음으로 중요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라는 소설 속의 작가의 어머니는 밤늦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큰 아들에게만 장독대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라면을 끓여 주셨다 했다.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가도 라면 끓이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큰오빠의 밥상머리에 이끌리듯 앉아 부러운 눈초리로 오빠의 라면 먹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몽유병 환자들처럼 라면냄새에 이끌려 하나둘씩 나오게 되면 어머니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내 팔자야를 외치며 라면보다 훨씬 많은 물을 콸콸 쏟아붓고 라면의 양을 늘려 나머지 형제들을 먹이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가르치던 학원선생님이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으셨는데 대학에 다닐 때 독서실 총무를 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저녁은 항상 라면을 먹었다고 하시며 같은 종류의 라면만 먹으면 질려서 못 먹으니까 모두 다 다른 종류의 라면을 사다가 놓고 드셨다고 했다.

이미 경제적 성공을 거두어 큰 강의실에서 멋들어진 슈트를 입고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셨지만 힘들고 가난했던 추억에 잠겨 아련한 눈빛으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셨다.

학교성적 걱정이 인생의 전부였던 우리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나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그 생소한 이야기들이, 선생님의 눈빛이, 장기기억 속에 안착이 되었다 보다 싶다.


요즘은 라면을 가지고 엄청난 요리로 둔갑을 시키는 것이 유행인지 기상천외한 라면 요리법들이 속출하고 있다.

라면에 온갖 싱싱한 해물을 넣고 끓이는 해물라면부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한우스테이크 짜파구리, 요리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이 끓이는 비법라면들까지..

라면은 이상하게 밖에서 먹으면 또 다른 맛이 난다.

찬바람을 맞은 라면이 맛을 둔갑을 시키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홀딱 반하는 맛이 난다.

또 여럿이 함께 젓가락을 들고 설치게 되면 라면은 또 맛을 둔갑시켜 아무리 먹어도 라면의 양이 모자라게 된다.

한인타운에 좋아하는 돼지고기 전문점이 있다.

큼지막한 솥뚜껑에 올려준 여러 가지 부위의 돼지고기를 즐겁게 먹고 나면 종업원은 현란한 솜씨로 솥뚜껑 김치볶음밥을 뚝딱 만들어 주고 양은냄비에 펄펄 끓인 라면이 등장을 한다.

라면만 끓이는 이가 따로 있는지 항상 라면은 그 사람이 들고 나온다.

어찌나 꼬들하게 면발을 알맞게 익혔는지 돼지고기의 기름과 범벅이 된 고소한 김치볶음밥과 함께 먹는 라면과 국물의 맛이 생각나 그 음식점을 자주 찾게 된다.

요즘은 미국 마트에도 신라면 정도는 늘 구비해 놓고 있으며 코스코에도 한국라면을 박스로 팔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라면맛이 세계에서 일품이 된 것이 사실인 거 같다.


아.. 이렇게 드디어 라면글을 쓰고야 말았다.

라면글을 썼으니 앞으로는 앞에 앉은 식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며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 끓이는 방법은 계량컵을 이용해 딱 알맞은 물을 넣은 다음 동봉된 수프와 파만 넉넉히 썰어 넣는 클래식한 요리법이다.

라면은 그저 라면맛이 나야 가장 제맛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이 글을 빨리 마치고 라면을 하나 끓여 먹어야겠다.

제발 라면단상의 2탄이 생각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글은 '라면단상' 릴래이 글입니다.

저는 @환오 작가님을 지목하고 바통을 넘겨 드렸습니다.

'환오의 라면단상'을 기대해 주세요~>



https://brunch.co.kr/@yjchoichoi/282


https://brunch.co.kr/@nanju/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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