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불루 작가님이 멀리서 내민 손에 응답합니다.
유치한 질문이지만 해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마지막 끼니로 무엇을 선택할 건가요?
좋아하는 수많은 먹거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 소울푸드라 자처하는 떡볶이부터 입에서 살살 녹는(없어서 못 먹는) 한우 채끝등심, 아들 두 녀석과 그에 못지않은 먹부림을 부리는 남편 덕분에 선택하는 호O이두마리치킨. (여긴 간장맛과 매운간장맛이 일품이다.) 일산이면 떠올리는 유명한 닭칼국수 맛집보다 더 맛있는(내 기준상) 바지락칼국수와 갓 버무린 생김치 맛집, 베트남은 가보지 않았지만 원조보다 원조일 거 같은 매운 소고기쌀국수와 스페셜볶음밥집.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만의 맛집들을 떠올리자 침이 입술 밖으로 흘러내릴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음식들을 뒤로하고 나의 최종선택은 단출하게도 '라면'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오롯이 본재료로만 끓인 기본 라면.
어느 브랜드를 선택할 것인가에서 머리가 또 지끈거리지만,
그래도 무조건 '라면'이다.
라면에 대한 내 마음을 고백하자면 이중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를 사랑하지만 왠지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몸에 좋지 않으니까.
'인스턴트'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배척되고 있으니까.
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동안 미안했다. 솔직히 비겁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침내' 당신을 선택할 것이다.(며칠 전 '헤어질 결심'을 보고 탕웨이 대사 중 '마침내'라는 단어에 꽂혔습니다. 안 보셨다면 한 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내 인생 첫 라면은 언제였을까?
머리털을 아무리 쥐어짜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근 초딩때 맛봤을 것이고, 본격적으로 혼자서 끓여 먹기 시작한 건 중학생 무렵인 거 같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집에서 라면 정도는 혼자서 거뜬히 끓일 줄 아는 아이였다.
그 라면은 점점 진화를 거쳐 참치와 치즈가 올라가더니 후추까지 톡톡 마무리하면 근사한 저녁 한 끼가 되어 주었다.
45년 인생에서 친구 같던 라면과 생이별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바야흐로 2000년도 초반, 20대의 시작과 함께 갑자기 불어버린 살들로 옷들은 악악 비명을 질러대며 하나씩 쓰러져나갔다.
지방에서 학교를 다녔던 시절 나를 위로해 준 것은 학교 선배들과의 술자리였다.
술살이 붙은지도 모르고 친오빠가 군대 휴가를 나와 내 자취방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난 기억에 안 나지만 라면을 끓여주면서 이거 국물까지 다 마셔야 한다고 남기면 안 된다고 했단다.
아마 음쓰 처리가 귀찮아서 그랬겠지.
오빠는 그때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를 표현할라치면 양팔을 거하게 옆으로 올려 놀려댔다.
멀리서 노랗게 염색한 뽀글 머리 저팔계가 걸어오고 있었대나 어쩠대나.
라면 쪼가리 하나 남기지 않고 먹방을 펼치던 내 모습이 오빠에게 꽤나 인상 깊었나 보다.
편입을 결심하고 휴학계를 내고 나서야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원래 몸무게보다 10킬로는 훌쩍 넘게 불어버린 몸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한창 반짝거릴 나이인데 변한 모습 때문에 친구들과 연락도 부담스러워졌다.
독하게 다이어트를 결심하면서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때는 어쩔 수 없이 다이어트 식으로 먹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두 개 올리고 하나는 면을 삶아서 건진 다음 기름기를 뺀 뒤, 새 냄비에 면을 익사시킨다. 물론 면은 반으로 쪼개서 넣는다. 수프도 절반만.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먹음 맛은 있는 거뉘?
역시 기름이 빠진 라면은 맛이 없다. 맹하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후루룩 한 젓가락 먹으면서 단지 '먹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곤 했다.
눈물겨운 다이어트가 끝나고 원래 체중으로 돌아왔지만 라면은 예전처럼 친한 친구가 되진 못했다.
6개월 이상 건강식으로 유지하던 내 입맛이 살에 민감해져 버린 탓이었다.
그런 나에게 결혼 전 오빠는 라면부탁을 곧잘 했었다.
라면 좀 끓여줘.
귀찮은 듯 하지만 실상은 즐겁게, 흔쾌히 정성 들여 라면을 끓여 대접한다.
후~~~ 뜨거운 라면을 불어가며 맛있게 먹는 오빠를 빤히 쳐다본다.
한 젓가락만 먹어도 돼?
아오이씨. 야! 그럼 두 개 끓여야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쳐다보는 얼굴이 농담은 아니다.
한 젓가락 뺏어먹었다가는 몸싸움이 일어날 거 같다.
라면은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다가도 막상 냄새를 맡으면 미치도록 한 젓가락이 당긴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라면의 DNA가 둘째 아들에게 온 걸까.
8짤 초딩 인생에 벌써 라면맛을 알아버렸다.
시작은 남들과 비슷하게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가 되는 국민라면 짜파게티였다.
4살쯔음 먹여봤다. 역시나 잘 먹었다.
대부분 아기들처럼.
하지만 양심상 일주일에 한 번 원칙을 지켰다.
나는 '부모'였기에 성장기 어린아이에게 영양가 있는 식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1개 끓여서 나눠 먹기 시작한 라면이 어느 순간 1개 끓이면 아이 혼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아이의 면사랑은 짜파게티에서 국물맛으로 넘어갔다.
매운맛으로 주면 안 먹을 줄 알았더니 이 녀석 독하다.
우유를 두 잔씩 드링킹 하면서 기어이 먹어냈다.
그래서 최근에 정착한 라면은 진라면 순한 맛이다.
어차피 먹어야 한다면 덜 맵게 계란이라도 풀어서 영양가를 챙기리라.
내 불손한 의도를 눈치챘는지
아이는 왜 계란을 넣었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아...이 녀석 나랑 입맛이 똑같다.
나 역시 계란보다 본연의 라면맛을 좋아하는데.
그래도 계란을 넣어야 더 맛있는 거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아이를 설득한다.
아이는 다음부터는 계란을 넣지 말라며 나에게 단도리를 시킨다.
그으래. 아들아, 너도 아는구나. 라면의 맛을 말이야.
네가 나한테 사랑인 것처럼 라면의 이름도 사실은 '사랑'이야.
내가 뚱뚱했을 때도 말랐을 때도 라면은 항상 엄마의 시린 속을 따뜻하게 데워줬거든.
새벽에 공복으로 이 글을 쓰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 가야겠다.
이 글은 제가 좋아하는 미스블루 작가님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꼬꼬무처럼 이어지는 라면 이야기를 만들어볼까요? :)
저는 다음 작가로 난주 작가님을 지목했습니다. :)
'난주의 라면단상'을 기대해 주세요~
https://brunch.co.kr/@jooyoung26/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