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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ersjoo Oct 30. 2023

감정 소화불량자의 도전

프롤로그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좋아한다.

몇 번을 봤나 되돌아보면 열흘을 줘도 답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았다. 늘 랜덤 플레이리스트처럼 화면을 틀어놓고 지낸 적도 많다.


드라마 속 장면들 중엔 당연히 손꼽는 장면들도 많다. 그중엔 주인공 아키코가 오랫동안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식당을 샌드위치 가게로 리뉴얼하며 혼자 공원에 산책 가는 장면을 참 좋아한다. 대사도 없고 그저 인생의 굴곡이 몇 개쯤은 생긴 나이 정도의 여자가 혼자 슬슬 걸을 뿐이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살짝 머금은 미소를 띠고 하늘과 바람을 느낀다. 나는 그 장면이 그렇게 좋다.


왜 그렇게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요란스럽지 않은, 하지만 조용히 단단한 혼자만의 변화를 공감 가는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변화의 시간이지만 아키코는 삶을 차분한데 때론 과감하게 일궈가는 사람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 좋았던 거다.



나도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공식적으로 땅땅 진단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난대 없이 밀려오는,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우울감에 빠지기도, 그리 큰일이 아닌데 미리 불안해하기도 한다. 약도 먹고 상담도 성실히 받는다.

처음 혼자의 힘으로 이 거친 파도의 오르내림을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문의를 만나러 다닐 땐 작아지고 자책하기 바빴다. 아, 나 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성실히 살았는데,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리 약해 빠진 마음을 가졌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젠 이렇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신경정신과를 가본 사람과 아직 안 가본 사람으로 나뉠 뿐이라고. 누구의 마음속에서나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라고. 그저 나는 더 적극적으로 공식적인 진단을 받고 치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왜 이럴까 생각하는 것은 그만하고 어떻게 나아질까를 찾아보자고. 나도 아키코처럼 변화할 때라고.



한 달에 한 번 말일쯤 정기적으로 만나는 의사 선생님과 함께 풀어가고 있는 최근의 주제는 '잃어버린 삶의 의미 찾기'이다. 선생님은 우울하고 불안하다는 감정을 넘어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지경까지 간 나에게 더 많은 약을 처방해 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약은 늘었지만, 지금 맹물씨(나는 맹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이유는 차차..)는 스스로 득음의 경지에 가까워져 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그 사실을 몰라. 내가 이제야 드디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시작했고,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솔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드디어 득음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걸 말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죠? 저 더 안 좋아진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니. 날 만난 지 몇 년 만에 드디어 진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거예요. 그동안은 전문의인 나조차 생각보다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속았거든요. 언제나 지난 상담 때보다 더 밝아진 모습을 보여줬고, 의지를 보여줬고, 기운을 차려왔고. 그런데 그게 자신과 나를 모두 속이고 있던 거였어요. 그러니 이렇게나 힘든 시기가 온 거죠. 많이 왔어요, 맹물씨."


무슨 이야기인지 딱 떨어지진 않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갔다.



그날 나는 선생님이 내준 한 달간의 숙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샤워를 하며 행여나 내가 갑자기 어떻게 돼도 그리 아쉬울 게 없는 것 같은 내 인생에, 그래서 그저 담담해진 나의 마음에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하고 말이다. 그러다 생각했다.


'다시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우면 새로 만들어보자.' 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말리지도 않은 머리를 한채 오래전부터 왠지 하지 않은 숙제처럼 느껴왔던 장기기증신청을 했다. 무겁고 심각한 그 표현보다 과정은 매우 간단했다.



내 삶의 의미에 전혀 새로운 것이 하나 그렇게 생겼다. 만약 실제 장기기증을 하게 된다면 9명 정도에게 새 삶이나 새 건강을 선물할 수 있다는데, 내가 그걸 할 수 있게 된 거다.

'아. 혹시 모를 그 9명을 위해 더 건강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도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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