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을 향하는 길에서 과거를 돌아보다

8장 2절

by 정신과의사 이주영


"농담 하나를 들었어.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가 우울하다고 말했지. 인생이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위협적인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고, 앞날은 모호하고 불확실해 보인다고. 의사가 말했지. '치료는 간단해요. 위대한 광대 파글리아치가 오늘 밤 우리 도시를 방문했거든요. 가서 그의 공연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제가 파글리아치예요.'" - 앨런 무어 [워치맨] 중




2023년 6월 말, 짐을 가득 담은 차를 몰고 아내와 두 아들과 그간 살았던 케임브리지(Cambridge)를 떠났다. 이른 새벽, 막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서쪽을 향해 달렸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사추세츠 여름 아침 공기는 경쾌했다. 길었던 임상 수련이 끝났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과 차폐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차 안이었기에, 웃음을 중도에 굳이 멈출 필요도 없었다.


한국에서의 전공의 수련을 포함하면 딱 10년의 기간이었다. 콜로라도까지 도로에서의 26시간의 여정만 지나면 드디어 그 시점이 올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곳에서 독립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되는 그 순간. 꿈속에서, 그리고 백일몽의 깊은 아련함 속에서, 이 변태(metamorphosis)의 순간을 얼마나 그려왔던가.


소아정신과 전임의 졸업식이 끝나고 프로그램 디렉터인 쉬린 카마(Shireen Cama) 선생님의 배려로 며칠 일찍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비자로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방인인 나에게 다음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며칠의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이었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우리 가족의 이사를 도와주시러 오셨다. 어머니와 아내는 내가 떠난 이틀 후, 비행기 편으로 아이들과 이삿짐이 담긴 가방들을 덴버로 날라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 둘과 네 개의 이민 가방과 함께하는 편도 항공 여행에 비하면 2박 3일간의 운전은 목가적이면서도 치유의 여정이었다는 사실을.


운전을 하면서 들을 음악들을 며칠 전부터 틈틈이 리스트로 만들어 모아놨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크게들을 노래들. 그리고 그 음악과 함께 연관된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과거를 한 번 돌아보기에 의미 있는 인생의 반환점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Sunlounger – Another Day on the Terrace



알민 반 뷰렌 (Armin van Buuren)의 [보편적 종교(Universal Religion) 챕터 4] 음반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내가 가장 아끼는 전자 음악 앨범의 비트가 귀를 따갑게 울리는 동안 지평선 위로 보이는 하늘은 이른 아침의 핑크빛을 내려놓고 있다. 음악이 후반부를 향해 속도를 올려갈수록 새파란 하늘이 시야 안에 녹아든다.


한국 전공의 저 연차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는 나아갈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정신전강의학과 전공의로 수련을 시작했지만, 내가 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환자를 내가 잘 돕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좋은 정신과 의사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의 ‘버티기’식 생활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하루 50명이 넘는 환자를 외래에서 보고 또 회진을 위해 병동으로 오는 교수님들을 보면서 내가 평생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전공과를 바꾼 동기를 따라 일을 그만둘까에 대해서도 고민했지만, 나에겐 그걸 시행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 때 알민 반 뷰렌(Armin van Buuren)의 라디오 쇼 스테이트 오브 트랜스 (A State of Trance; ASOT)을 들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어폰이 음악을 뿜어내면 머릿속 산적해 있는 고민들이 잠시 시들해졌다. 나아가는 것도, 뒷걸음질도 불가능할 것만 같은 마음속의 감옥에 갇혀 살았다. 그 와중에 음악이라는 몽롱함은 현실의 고통을 조금씩 걷어내주었다. 음악과 같이 나도 타인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알민 반 뷰렌이 진행하는 스테이트 오브 트랜스(ASOT) 라디오쇼는 2025년 현재도 진행 중이다.


전공의 3년 차 때가 되어서 석사 과정에 지원을 했다. 연구를 병행하면서 정신과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면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자문 정신의학 (다른 과에 입원한 환자의 정신과적 문제를 돌봄)을 담당하고 계신 함봉진 선생님 아래에서 연구 방법론을 배웠다. 함 교수님은 대학병원에서 극도로 바쁘게 일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더라도 따뜻함을 지켜낼 수 있다 걸 보여주셨다. 교수님은 단순히 연구원이자 지도 학생인 것을 넘어 나를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한 인격체로 대해주셨다. 내가 관심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고자 할 땐 지지를 아끼지 않으셨다. 함 교수님이 멘토였기 때문에 직업 정체성 혼란 중에도 정신과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지도 교수님의 존재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내 안의 불안을 누그러뜨리는데 (앞에서 설명한 ‘상호 조절’)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원 업무에 빠져있다 보니 정신과 수련의 3년 차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 무렵, 정신분석가 정도언 교수님께서 뉴욕 웨일 코넬(Weil-Cornell) 병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정도언 선생님은 연차를 가리지 않고 일과가 끝난 전공의들을 모아서 정신치료와 관한 책을 읽고 주기적으로 토론하는 시간을 마련하셨다. 미국에서 나이 지극한 지도 전문의들이 저 연차 전공의도 붙잡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을 보시고 귀국 후 수련의 교육에 더 관여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이 북리딩(bookreading) 모임에서 전공의 수련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정신과 임상 업무의 매력을 느꼈다. 정신 치료는 실제 환자 안의 내적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치료법이었고, 이것을 더 열심히 배우고 싶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도언 교수님께서 돌아와서 전공의를 시간을 짜내서 가르치고 싶게 만든, 그 미국의 정신과 교육을 나도 받아보고 싶어졌다. 이때 회색빛으로 바래가던 내 안의 무언가에서 불꽃이 일었다.




♫ Keith Jarrett – Koln Concert, Part IIc



평야지대를 가로지르며 먹구름 몰려드는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오디오로 키스 자렛 (Keith Jarrett)의 피아노 즉흥 연주가 흘러나왔다. 그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늦은 밤 미약한 조명을 받으며 홀로 방에 앉아 있는 기분을 자아낸다. 밤풍경에 창문에 반사된 나 자신의 실루엣이 겹친다. 거뭇한 하늘은 기어코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미국 중서부 시골의 작은 숙소에 도착했다. 비 때문에 예정보다 늦은 도착이었다. 막바지 이삿짐 정리에 바쁜 아내와 잠들기 전 마지막 에너지를 불태우고 있는 아이들의 안부를 전화로 확인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랜 운전 때문인지 오른쪽 다리에서 얼얼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TV는 의식의 변두리 쪽으로 백색 소음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 전공의 수련 마지막 해와 닮은 풍경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후 나는 부모님 집을 떠나 홀로 살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뒤늦은 29살의 독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에 월세방을 구했다. 막걸리와 전 굽는 냄새로 가득 차는 동대문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나만의 작은 공간이었다. 논문 작업을 하다가 늦은 시간 방에 돌아오면 음악을 틀고 침대 위에서 한동안 서울의 밤풍경을 멍하게 바라보곤 했다. 혼자 살면 자유가 주는 희열에 젖어 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됨에서 오는 쾌감은 강하고 짧았다. 가을의 냉기가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매트리스 아래로 깔릴 때, 나는 고독을 느꼈다.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Koln Concert) 음반을 이 무렵 많이 들었다. 이 음반의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고독마저도 절대자의 섭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일년간 살았던 동대문구 자취방으로 향하는 골목길. 한 주말 오후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전공의 수련이 끝나고 철원에서 군의관 복무를 시작했다. 와수리 근처에 위치한 우리 부대 내부 독신자 숙소에 방을 배정받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과가 끝나면 미국의사고시(USMLE) 준비를 했다. 전문의 시험을 막 마친 시점에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학생 때 배우고 잊고 있던 기초의학 지식을 머리에 재입력하는 것도 크나큰 고통이었다. 동료 수험생 없이 (시험 준비 온라인 커뮤니티의 존재는 훨씬 나중에 알았다) 일과 후 홀로 군 숙소에서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다시 고독과 마주하는 과정인 것만 같았다.


동대문 오피스텔과 다르게 군 관사에서의 시간은 훈훈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수풀에서 산바람을 탄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없이도 귀가 즐거웠다. 숙소 내 다른 군의관들과 끈끈하게 지냈다. 함께 모여 부대 연병장을 뛰어 돌고 군인 회관에 가서 수다를 안주 삼아 삼겹살과 부대찌개를 먹었던 기억이 참 따뜻하게 남아 있다. 저녁에 관사로 복귀할 때면 칠흑 같이 불이 꺼진 부대 입구에서 암구호를 외치던 기억도 선명하다. 위병소 병사들은 피곤할 법도 한 밤에도 항상 친절했다고 기억한다. 이 모든 타인의 존재로 인해 전방에서의 군생활도 빠르게 흘러갔다.


3사단 의무대 식구들과. 저자는 오른쪽 아래 전투모 착용 중.




♫ Gérard Presgurvic - Coupables (from the musical Roméo et Juliette)



시카고 지역을 지나쳐 더 서쪽으로 달렸다. 콜로라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평야 지대를 한 동안 가로질렀다 싶을 때 갓길에 익숙한 음식점들과 주유소들의 로고들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럼 얼마 후 작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진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태양이 이동하며 지평선 위 배경색을 천천히 바꾸었다. 차 오디오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트랙을 하나씩 차례로 틀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내를 만나고 처음 함께 본 뮤지컬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아내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난 아내가 찍어서 모아논 사진들에서 큰 울림을 느꼈다. 사진은 작가가 렌즈를 이용하며 모두가 공유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하는지를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 사진에는 작가의 자기 표상이나 대상 표상(앞에서 설명한 대상관계 개념들)이 필연적으로 담기게 된다. 아내는 햇빛이 다양한 사물들을 비출 때 일어나는 색감과 채도의 변화, 그리고 파생되는 그림자들을 사진에 개성적으로 담았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생각을 강요하는 그런 사진들이 아니었다. 모네(Monet)나 쇠라(Seurat)의 그림에서 풍기는 아련함과 따뜻함이 있었다. 이런 사진들을 찍고 모으는 사람은 악하거나 이기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 아내와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내는 많은 다툼 중에 감정적으로 봉합되지 못할 것 같은 상처를 나에게 주지 않았다. 서로 타협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가치관의 차이가 다행히 없었다. 그래서 다툼 후에 관계의 단절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갈등은 서로 살아온 삶의 경로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오히려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어떻게 하면 같은 일로 감정 상할 일을 피할 수 있을까를 비교적 차분히 얘기할 수 있었다. 아내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대한 책임감과 나에 대한 존중을 꾸준히 보여줬다. 그래서 아내와는 나머지 생을 함께 하는 중에 어떤 문제나 다툼이 발생해도, 결국에 회복에 이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권의 나라로의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를 많이 믿어 주었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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