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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Playing): 왜 중요한가?

2.1.

     많은 심리학 주제 중에서 놀이(play)에 대해 가장 먼저 쓰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앞으로 다룰 내용 중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인 데보라 카바니스 (Deborah L. Cabaniss)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평가하는 다섯 가지 영역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일과 놀이 (work and play)”였다. 놀이를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놀이가 성인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매우 다양하다. 놀이는 긴장과 불안을 완화시켜 주는 기능이 있다. 또한 놀이를 통해 개인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놀이가 발달 수준에 맞지 않거나 큰 위험을 동반한다면, 이러한 긍정적인 기능이 상쇄될 정도로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박이나 마약 사용에 몰두하는 사람의 놀이를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이 누구와 어떻게 노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성인 내담자(Client)들과의 초기 평가에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보통 어떻게 긴장을 푸나요?”라는 질문을 꼭 한다. 만약 그 놀이의 수단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위험하지 않으며, 긴장을 풀어주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한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놀이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놀이는 더욱더 중요한 행위이다. 오래된 영어 속담인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놀지 않고 일만 하면 지루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놀이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였던 도널드 위니컷 (Donald Winnicott) 은 아이들의 놀이가 정신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술해서 학계에 알렸다. 그는 놀이가 아이들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말했다. 놀이는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고 긴장을 푸는 기능을 넘어서, 어린아이들의 정서(emotion), 인지(cognition), 사회성 (social) 발달에 큰 기여를 한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놀이 치료 (play therapy)가 발달하게 된다.  



    놀이의 이러한 여러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놀이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부모와 양육자들은 아이들에게 점점 더 일찍 공부에 매진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물리적 안전을 추구하는 움직임(safetism)과 휴대용 전자기기의 발전으로 인해 아이들의 놀이 시간은 점차 실제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옮겨가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자유롭게 놀았던 아이들이 집행기능(executive function)의 발달로 인해 향후 인생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개인적인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나는 만 4세에서 6세 사이에 충청남도 천안에 살았다. 당시 성정동 뒤쪽은 논밭이었고, 그곳은 나와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논둑을 따라 걸으며 여름에는 올챙이와 개구리를, 가을에는 매미와 사마귀를 잡았다. 겨울에는 물이 얼면 썰매를 탔다. 지금 지도를 찾아보니, 논밭은 사라지고 시내 한복판이 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던 작은 저수지였던 곳에는 천안여성회관이라는 건물이 들어섰다.  


    유치원을 멀리 다녔던 나는 동네 친구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논밭으로 나갔다. 주로 친형과 함께였다. 우리는 여럿이 함께 놀면 더 재미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둘이 놀다가도 누군가가 보이면 바로 합류해서 놀았다. 물론,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거나 새로운 그룹에 초대받는 것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초기 상호작용은 어느 정도 긴장감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이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성공을 위한 멘트, 타이밍, 비언어적 행동 등을 습득했던 것 같다.  


    한 집단이 된 후에는 무엇을 하고 놀지를 정해야 했다. 때로는 의견이 강한 사람이 놀이를 이끌기도 하고,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도 했다. 결론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대놓고 반대 의견을 피력하거나,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성공하면 의가 상하는 사람 없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정해진 놀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규칙을 설명해 주고, 정해진 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서운해하는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까지 놀이를 통해 감정을 읽는 능력과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다.  



    만 7세 때는 아버지 직장 때문에 온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간 살았다. 한국에서 항상 바쁘셔서 놀지 못했던 아버지와 매일 저녁 놀 수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는 체스(Chess)와 배틀쉽(Battleship) 게임을 거의 매일 밤에 했다. 부모님이 영어로 된 게임 규칙서를 읽어주시면 형과 내가 배워나갔던 기억이 난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큰 플라스틱 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주걱으로 퍼서 컵에 덜어 먹으며 게임을 했다. 특히 카펫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인공 벽난로의 온기를 느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게임을 하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 두 가지 게임은 모두 마주 보고 앉는 것을 요구했는데, 서로 얼굴을 보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 좋았다. 캐나다에 가기 전 우리 가족은 주말에 등산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활동은 나란히 앞뒤로 걷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 보는 시간이 적었다.  


    겨울이 되고 캐나다의 긴 밤이 시작되면, 이 집에서의 매일 저녁 20-30분의 시간이 더 따뜻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당시 공립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모두 긴장하며 지냈다. 하지만 집에 오면 저녁 먹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낮 시간의 스트레스를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당시 부모님이 게임에서 자주 져 주셨던 것 같은데, 그때 게임에서의 승리가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부모님과의 게임에서 가끔 이기면 (부모님이 봐주신 여부를 떠나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게임 시간 동안 승자로서 패자를 배려하는 감정 제어법을 배웠다. 진 사람이 기분이 많이 나쁘지 않게 적절히 기쁨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져도 승자가 너무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게 너무 시무룩해지지 않는 연습을 자연스럽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 1년의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났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부모님 두 분 다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셨다. 부모님도 우리 형제도 각자의 삶 때문에 바빠지고 스트레스를 받아 관계가 소원해질 때에도 그 캐나다에서 함께 했던 가슴 따뜻해지는 놀이 시간을 떠올리면 좋은 관계의 불씨를 살려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족이 서로 마주 보고 함께 유의미한 즐거움과 온기를 공유하게 되면, 그 좋은 기억은 오래 남아 그 가족의 자산이 된다. 가족 치료에서도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매주 10-15분의 활동을 찾는 것이 중요한 치료 과정 중 목표가 된다.  




    만 9세 때는 한국에서 미니카 열풍이 불었다. '달려라 부메랑'이라는 일본 원작 만화를 TV에서 방영하면서 초등학생들은 각자의 미니카를 하나씩 다 가지고 있었다. 동네 문구점에는 각종 자동차, 모터, 그리고 개조 도구를 판매했다. 그리고 문방구 앞에는 미니카 경주 트랙이 깔렸다. 당시 일주일 용돈이 2000원이었던 나는 본체만 6000원에 달하는 일제 타미야 미니카를 위해 기다림을 배웠다. 그리고 부모님 신발을 닦으면 추가로 주어지는 돈을 조금씩 모아서 자동차 개조에 필요한 범퍼, 안테나, 롤러, 모터를 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친구들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라지고, 경주 트랙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지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처럼 쉽게 인터넷에서 리뷰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에,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야 했다. 동네 문구점에서 빠른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비결을 물어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개조해도 항상 더 빠른 미니카가 등장했다. 특히 옆 동네 더 치열하다는 문구점 앞에 가면 훨씬 빠른 무림고수들의 차가 등장했다. 자전거를 타고 15분은 가야 도착하는 옆 동 트랙에는 360도 루프(Loop)가 있었다. 이걸 통과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분통함은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 코스를 통과하기 위해 또 수소문을 하고 여러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리고 또 용돈에 추가 심부름을 하는 수고와 시간을 거쳐 모터를 바꿔야 했다. 그 코스를 안정적으로 돌 수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자긍심과 자부심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정이었다. 당시 풀고 잠갔던 나사의 숫자가 몇이던가. 처절하게 트랙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뒤집혀 있는 미니카를 집어든 것이 몇 번이던가. 이 놀이로 인해 나는 노력과 (적당한) 좌절이라는 삶의 축소판 같은 사이클(cycle)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었다.  




    만 11세 무렵 처음으로 집에 컴퓨터가 생겼다. 인터넷이 연결되기 전에는 컴퓨터 게임이 디스켓이나 CD로 발매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게임의 종류가 많지 않아서 친구들 여럿이 같은 게임을 했다. 매달 발행되는 게임 잡지에 딸려 나오는 무료 게임을 친구들과 함께 하며 감상과 팁을 학교에서 교환했다. 방과 후에는 서로의 집에 가서 함께 게임을 즐겼다. 예를 들어, 심시티 2000을 하면서 도시 계획과 세금 구조에 대해 배웠고, 삼국지 영걸전을 더 잘 즐기기 위해 이문열 삼국지 10권을 읽었다. 문명 2를 하면서 다양한 세계 불가사의와 정부 구조를 배웠고, 대항해시대 2를 하면서 사회과 부도를 펼쳐놓고 세계 지리를 학습했다.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적당한 수준의 좌절을 이겨냈을 때의 보람을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현재는 유튜브에 검색 한 번으로 게임 팁을 공유하는 초고수들의 영상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에는 게임 팁을 구하기 위해 같은 게임을 하는 동료들을 주변에서 찾아야 했다. 그 시절에는 아무리 1인용 게임이라도 주변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즐겼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과 짜릿함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의 매력을 배웠다. 따라서, 혼자 동굴에 갇히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다.  


    만 13세가 되었을 때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게임 주인공의 스토리를 공유하며 즐거워하던 우리는 이제 음악 멜로디와 가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형과 친구들의 추천으로 REF, 패닉, 쿨, 전람회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 용돈으로는 2주 어치를 모아서 음반 가게에서 카세트 하나를 살 수 있었기에, 더 다양한 음악을 들으려면 테이프를 친구들과 바꿔 들어야 했다. 카세트 몇 개를 돌려가며 들었기 때문에 적은 수의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책 읽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당시 나에게 노래 가사는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통로였다. 왜 REF는 사랑을 "찬란"하다고 했을까? 왜 패닉은 "혀"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주제에 대한 노래를 만들었을까? 친구들과 이런 주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눴고, 노래를 들으며 느낀 감점을 이야기했다. 이러면서 친구들과 끈끈함을 느끼고 동시에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과 궁금증을 키웠던 것 같다.  




    독자들은 어릴 적 어떤 놀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예를 길게 들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다양한 놀이를 통해 개개인은 유의미한 사회, 정서, 인지적 발달을 이룩해 낸다는 것이다. 특히 여럿이 함께 같은 공간에서 하는 놀이일수록 이러한 기능이 강하다. 놀이라는 즐거운 행위가 매개체가 되어 타인과 함께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회에서 요구되는 관계의 뉘앙스와 에티켓도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신화(mentalization) 능력과 자기 제어 능력(self-regulation)이 함양된다. 이러한 능력들은 성적표처럼 명쾌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양육자들은 놀이의 힘을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놀이가 발달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신경과학 분야에서 이미 반복적으로 증명되었다. 한 인간에게, 특히 발달하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는, 타인과 함께하는 놀이 행위를 절대 시간 낭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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