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케임브리지에서 소아정신과 전임의 1년 차는 놀이를 치료 도구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반면, 2년 차 때는 배정되는 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치료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놀이 테크닉과 놀이를 통해 환아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놀이 장인(?)이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됐다.
2년 차 과정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는 항상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두 시간 동안 나를 포함한 5명 전임의들은 각자의 놀이치료 세션(session)을 녹화하여 지도 정신분석가와 함께 시청하고 논의했다. 성인 정신치료와 달리 놀이치료는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가 많기 때문에 비디오 녹화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디테일을 기반으로 학습이 이루어졌다.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음소거 상태에서 비디오를 먼저 틀었다. 소리가 제거된 상태의 녹화본에서는 치료실을 채우는 어색한 침묵이나 환아의 자세, 미세한 눈빛 교환이 비교적 잘 보였다. 초보 치료자로서 자신의 어색한 놀이 현장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처음에는 참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어색함이라는 작은 비용을 지불하고 치료 중에 놓쳤던 환아의 다양한 소통의 노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치료실에서는 다음에 어떤 말을 꺼낼지, 어떤 행동을 보여 줄지를 고민하다가 놓쳤던 주옥같은 디테일을 발견하는 건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음소거된 놀이 영상에서도 의미를 찾아내 주시는 닐 카스 (Neal Kass) 선생님의 이끎 덕분에 이 시간은 진지한 토론과 공유의 장이 되었다.
하루는 편이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전임의가 녹화해 온 5세 환아의 영상을 함께 본 이후였다. 그 아이는 놀이에서 인형과 동물을 이용해 꽤 공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한 손으로 다양한 사람 모양의 인형을 하나씩 반대 손에 있는 맹수 (호랑이와 공룡으로 기억한다) 에게로 가져갔다. 인형이 하나씩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맹수는 인형을 물어뜯은 뒤 벽에 세게 집어던지기도 했다. 아이는 그렇게 하면서 약간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영상에서는 치료자를 향한 직접적인 위협은 보이지 않았다. 영상 속 전임의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걸었고, 물어뜯는 형태의 놀이 말고 다른 형태의 놀이를 고민해 보자고 했다. 그쯤에서 지도 선생님은 영상을 멈췄다. 우리는 놀이 중 공격적인 테마가 나왔을 때 치료자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의논했다. 사실 이 주제는 치료자뿐만 아니라 부모와 양육자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나 또한 코비드 팬더믹(Covid-19) 시기 한 학령기 환아와 원격으로 진행한 놀이치료 세션을 회상했다. 아이의 요청에 따라 함께 그림을 그렸던 기억. 컴퓨터에서 각자 마우스를 붓 삼아 스크린 위의 하얀 캔버스에 획을 그어가기 시작했다. 놀이 치료의 기본 원칙에 따라 아이가 그리고 싶어 하는 것에 박자를 맞춰갔다. 아이는 당시 유행하던 어몽어스(Among Us)라는 게임에 나오는 우주인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캐릭터를 죽였다. 빨간색 붓을 집어 들고 피가 낭자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 게임에는 꽤나 잔인한 일러스트가 실제로 나온다. 하지만, 아이가 능동적으로 피바다를 표현할 때는 게임을 넘어서는 뭔가 뜨거우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아이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지만 이래선 안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걸 그려볼 것을 권했다. 놀이 자체는 안전한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의 눈으로 그 놀이의 형태를 해석했을 때, 어떤 부정적이고 불편한 징후가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아이 주도로 진행되던 놀이는 중단되었다.
공격적인 놀이 행동이 나왔을 때 양육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아이를 빠르게 진정시키고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prosocial)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안전이 보장되는 한, 아이들이 공격적인 놀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는 것이 중요할까? 사실 둘 다 중요한 목표이다. 하지만 부모나 양육자의 입장에서는 전자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대한 유혹을 느끼기 쉽다. 밖에서 이런 공격적인 행동을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를 나쁜 아이로 보진 않을까? 이러한 공격적인 모습을 초기에 잘 뿌리 뽑지 않으면 나중에 더 심한 폭력성으로 자라나는 것을 아닐까? 양육자에게 내재화된(internalized) 도덕적 신념이 경보를 울리는 것이다. 사회에서 문제가 될 것 같은 공격성이 눈앞에 드러나면 그걸 즉시 중단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목표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이가 그런 공격적인 놀이를 통해 본인의 화나 공격성을 느낄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 그러한 화나 공격성이 표출될 때 타인에게 어떤 반응을 받게 되는지를 경험하지 못한다. 양육자로부터 (즉, 자신의 외부로부터)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제지받기 때문에, 이 감정을 어떻게 스스로 조절해야 되는지 경험할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다. 놀이를 통해서 아이 내면에서 나오는 순수한 감정이 (그것이 공격성이라도) 표현되고, 타인에게 소통되고, 결론적으로 제어되는 피드백(feedback) 과정은 중요하다. 아이가 내적 동기에 의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연습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격성이라는 감정도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가지고 놀아볼” 충분한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공격성을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나쁜 감정’으로 치부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경험일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 중 보이는 반칙 행동은 어떠할까? 자유 놀이와 달리 규칙이 있는 카드 게임이나 보드 게임을 할 때 양육자는 아이들이 반칙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할 것이다. 반칙은 주로 게임에서 질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견디지 못해 발생한다. 분노, 좌절, 슬픔, 시기심 등의 감정이 섞여 나타나는 불편한 조합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감내하며 호쾌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감정 조절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반칙을 해서라도 승리를 맛보고 싶어 한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반칙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된다. 패배가 남기는 상처는 그들에겐 아주 큰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와의 놀이 중 반칙 행동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반칙 행동을 바로잡아야 나중에 반사회적인 인격체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는 걸까? 놀이라는 저위험 환경에서 패배를 두려워하기에 저지르는 행동인 반칙을 굳이 직면할 필요는 없다. 보통 두 가지 접근법을 추천한다.
첫째, 아이가 반칙하는 순간 “지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 같은데!!”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면 아이는 반칙을 좀 더 편하게 시인할 수 있다. 아이에게는 패배도 견디기 힘들지만, 반칙한 것을 들키는 치욕감도 쉽지 않은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칙을 굳이 직면하고 뿌리 뽑을 필요는 없다.
둘째, 그냥 무시하고 놀이를 지속하는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왜 이렇게 이기는 게 어렵지? 허허!” 이렇게 말해주는 것도 좋다. 이렇게 하면 양육자가 한 번 대사 시킨(metabolized) 패배의 감정을 아이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아이는 파국화된 패배가 아닌 다른 감정 표현의 선택지가 있음을 이해하게 된고, 점차 놀이에서의 패배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놀이 상대방의 좌절감 표현으로 인해 반칙에 대한 죄책감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아이가 놓일 수도 있다. 놀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반칙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다.
정신분석적 놀이치료에서는 아이가 어떤 의제나 이야기를 가져와도 제지하지 않고 환영한다. 치료자나 환아 본인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다면 아이의 공격성 표출을 막지 않는다. 놀이 치료 시간 중 간혹 내가 손에 끼고 있는 손인형 (puppet)을 향해 막대를 세게 휘두르거나 장난감을 세게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보통 안전한 장난감을 바닥에 밀어서 보내는 좀 더 안전한 상징적 동작을 가르쳐 준다. 아이의 순수한 스토리 라인을 유지하되 안전한 형태로 표현하도록 규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이가 공격성이 담긴 이야기라도 편안하게 풀어낼 수 있게 된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놀이 중엔 허용된다는 메시지를 양육자가 아이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좋다. 이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함께 놀이에 참여하는 부모나 양육자가 스포츠 캐스터가 된 느낌으로 아이의 행동을 기술해 주는 것이다. 질문을 많이 하기보다는 평서문으로 리듬을 넣어 재밌게 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아이에게 “온전히” 놀이의 주제를 맡기고 아이를 따라가며 최대한 집중해서 관심을 쏟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온전히 받아들여진다는 건 참으로 강력한 경험이다. 인간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개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둘째, 놀이 중 감정이 실린 큰 행동이 보일 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갑자기 쌓아 올리던 탑을 강하게 쳐서 부숴버리는 경우라면 “부숴버리고 싶은 기분이구나”라고 말하면 된다. 굳이 “왜 부셨어?”라고 취조하듯이 물을 필요가 없다. “(보이는 행동)하는 기분이구나”라는 평서문을 들은 아이는 ‘내가 방금 왜 그 행동을 했지?’ 하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행동을 지배하는 자신의 내적 세계와 감정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문보다 평서문이 가지는 장점은, 아이에게 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되, 직면이나 강요를 피할 수 있는 퇴로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어도 아이에게 뭔가를 강제한다는 건 반발심을 키울 뿐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유 놀이는 아이의 부모나 보육자가 아이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치료자가 규칙을 강제하지 않는, 아이 스스로 규칙과 소재를 능동적으로 정하고 이끌어 가는 자유놀이(unstructured play)의 경우 좀 더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져 나타난다. 자유 놀이는 감정의 향연이다. 그만큼 다양한 감정이 표출된다. 이런 감정들이 (공격성이라도) 안전하게 표현되고 받아들여지면서도 전반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면, 아이는 그때마다 해당 감정들에 대한 제어력을 키우게 된다. 놀이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노출 치료라고 생각해도 좋다. 아이가 다양한 감정들과 자신의 행동을 연결 짓는 경험이 쌓여야 자연스럽게 타력에 의존하지 않는 진정한 자기 제어력(self-regulation)이 자라날 수 있다.
집에서 아이와의 놀이를 예를 들어 보겠다. 나의 첫째 아들은 기차놀이를 참 좋아한다. 만 3살 때 선로를 만들고 그 위에서 기차를 운행하는 자유 놀이를 하면서 우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아이는 특히 철도 건널목에 각종 차량과 사람들을 이용해 아수라장 현장을 만들어 놓는 걸 좋아했다. 기차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상황에서 아이는 소방차, 경찰차, 견인차량을 이용해서 서로 얽혀 있는 차량과 사람들을 차례로 구해준다. 아슬아슬하게 열차를 피해 건널목 게이트를 열고 운행 불가 상태가 된 차량을 끌어내면서 아이는 아주 즐거워한다. 때로는 일부를 구하지 못하고 (혹은 구하지 않고) 남겨 달려오는 기차에 부딪히기도 한다.
나는 열심히 스포츠 중계를 하듯 아이가 장난감으로 보여주는 기차 이야기를 읊어낸다. 놀이치료 기법을 무의식 중에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면 아이는 조금씩 시나리오를 바꾸면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버전(version)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나에게 특정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놀이에서의 기차는 망가져도 고칠 수 있고 탈선해도 쉽게 선로 위에 올릴 수 있다. 기차에 치인 사람들도 쉽게 치료된다 (놀이가 가지는 이 특수한 성질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아이는 충돌, 구조, 회복으로 상징되는 기차놀이를 통해 자신의 내적 공격성이나 머릿속을 스쳐가는 잔인한 생각들에 대한 제어력을 높일 수 있다. 즐거운 놀이 시간을 보낼수록 이런 무섭고 어두운 생각과 연결되는 두려움이 희석되게 된다.
기차와 주변 선로 상황을 자신이 물리적으로 지휘하면서 아이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아이디어나, 생각, 또는 충동을 놀이를 통해 시각화하고 자기 주도하에 조절해 볼 수 있다. 기차처럼 거대하고 빠른 물체가 자신이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가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내적 두려움을 놀이를 통해 마스터(master)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