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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단절을 기다리고 있을 뿐

4.1.

    개리(가명)씨는 내가 목요일 오후에 매주 만나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많이 우울했다. 그는 우울할 때면 암울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특히 지나친 우울감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로 인해 가족이 겪게 될 일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가족은 개리 씨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상상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큰 죄책감을 느꼈고, 그 죄책감 때문에 더 큰 우울감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항상 치료 시작 5분에서 10분 전에 대기실에 나타났다. 그는 실내에 들어오면 약간 어두운 색으로 바뀌는 안경과 야구 모자를 항상 쓰고 있었다. 초기 치료 과정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는 지속적으로 자유 연상에 기반을 둔 정신역동적 정신치료를 그와 지속하고 있었다. 즉, 내가 주도하여 어떤 말을 할지 정하는 것이 아닌, 치료자의 침묵으로 매 회기를 여는 치료 방법이었다. 


    어느 날, 개리 씨는 자신의 아버지와 통화한 이야기로 세션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황에 전혀 공감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열을 내면서 말을 했다. 그렇게 회기 종료가 한 5분 정도 남았을 때, 개리 씨는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했다. 자신이 인터넷에서 인지 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라는 기법에 대해 듣게 되어 조사를 해봤는데, 자신의 증상 치료에 있어서 굉장히 효과적일 것 같다고 말했다. 인지행동 치료 기법은 실제로 우울증에 치료 효과가 입증된 방법이기에, 나도 그 방법론에 동의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내가 진행한 치료의 성과가 충분치 않아, 개리 씨가 치료 회기 사이사이에 열심히 다른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해졌다. 동시에 나는 왜 개리 씨가 치료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침묵을 깨고 이 새로운 치료 방법에 대한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와의 통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의견을 주셨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죠.”  


    나의 이런 반응에, 개리 씨는 당일 세션에 올 때부터 생각해 놓고 왔는데 그냥 중간에 갑자기 생각나서 말을 했다고 했다.   


    “환자가 보통 제안하면 치료자가 한번 시도라도 해봐야 하는 해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게 제 아버지만은 아닌 것 같네요.”  


    개리 씨는 그렇게 말하고 몇 분 일찍 진료실을 나갔다. 그는 아마도 인지행동치료 기법을 이전부터 적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못하는 동안, 나는 그에게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의 치료를 강요하는 치료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다음 주, 개리 씨는 진료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이기에 5분가량 기다리다가 바로 전화를 했다. 그는 내 전화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놀랐다.  


    “지난주에 종료 시간 전에 나갈 정도로 저에 대해서 실망이 컸던 것 같아 보였어요. 인지행동치료는 함께 적용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 의견을 주게 된 전후에 개리 씨 마음에 일어난 생각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게 치료적으로 중요할 것 같아요.”  


    개리 씨는 그다음 주에 진료실에 와서 많이 울었다. 내가 “그럼 인지행동치료 오늘 당장 시작하죠”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에 그는 정말 크게 실망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바람(wish)을 좌절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개리 씨는 치료 종료를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종료했을 관계들을 상상하며 가슴이 쓰라렸다. 아마 회복할 수 있었던 관계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적 세계는 관계를 회복하려고 자신이 노력하는 걸 도저히 허용할 수 없었으리라. 그가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외로움으로 가득 찬 현 위치에 가기까지의 침강의 과정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내가 직장을 바꾸어야 했기에 결국엔 그와 치료를 종결해야 했다. 개리 씨는 내가 그에게 걸었던 전화를 반추해 냈다. 그는 떠나가는 자신을 누군가가 잡아준 경험이 가장 치료적이었다 했다. 깨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 그리고 관계는 그가 확고히 믿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잘 회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는 걸 그가 경험한 것이다. 정신치료는 매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시작하여 45분 혹은 50분 정해진 시간 동안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혹여나 치료자-내담자 관계가 단절되더라도 예측되는 시간에 예측되는 장소에서 재회할 것이라는 믿음을 양쪽 모두가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최적화하는 틀(frame) 때문에 정신치료에서 관계의 “단절” (더 고전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저항[resistance]이라고 칭하기도 함)이 발생할 경우 그것을 효과적으로 감지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는가? 완전히 관계를 끊어내는 극적인 단절이 아닌, 일시적으로 상처를 받아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는 상황까지 포함하면 관계의 단절은 사실 상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을 상정해 보자. 서로 연락을 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 관계의 질(quality)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추가 증거가 들어오지 않는 환경에서, 개인은 그 내면에서 객관적인 상대방을 자신만의 상상의(판타지) 재료들을 이용하여 변형을 시킨다. 이렇게 각자의 내면에 상대방에 대한 내적 표상(internal representation)을 키워내게 된다. 어떤 이들은 확고한 믿음을 기반으로 상대방에 대한 내적 표상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해 나간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관계에 대한 확신을 주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지 않을 경우 내적 표상을 쉽게 변형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 상황이 아니더라도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절의 위기에 놓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아정신과 수련을 받은 이후에는 인간관계의 단절이 극적으로 발현되는 걸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성인 정신과 수련에서는 환자들이 진료실에 주로 혼자 오기 때문에, 관계의 단절을 환자 입을 거치는 이야기로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소아 진료실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질 변화를 함께 오는 가족의 행동과 말을 통해 역동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자기 조절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함을 치거나, 공격적 혹은 반항적인 모습을 성인보다 훨씬 더 자주 보인다. 이런 문제 행동은 관계 단절의 단초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의 “기능“은 대체 뭘까? 아이들은 왜 때론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타인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이는 걸까? 일부러 상대방에게 고난을 선사하며 괴롭히려고 이러는 걸까? 훈육이 부족해서 이러는 걸까? 의도적인 악의를 상정하면 아이와 부모/양육자 사이 단절된 관계의 회복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는 진료실에서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아래에 기술한 두 가지 기능적 측면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환자와 그의 가족 사이 관계의 단절을 최소화할 수 있다.  


    첫째, 문제 행동이 때론 아이들에게는 상황을 편하게 해결해 주는 기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보통 아이들이 문제 행동을 보이면 부모나 양육자가 이들을 즉각 훈육하면서 상황이 마무리된다. 문제 행동을 통해 아이들은 부모나 양육자에게 상황을 타의적으로 종결시키도록 역할을 무의식 중에 부여한다. 아이의 표면적 행동은 ‘훈육과 꾸짖음의 대상’이 된다. 아이는 타인으로부터 (문제) 행동을 진압받는 일종의 ‘피해자’가 되면서 상황을 종결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상황 종결은 아이들이 애초에 문제 행동을 하게끔 만든 기저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 여러모로 편리하다. 시기, 질투, 외로움, 희망 없음, 분리 불안 등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이런 무거운 감정들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남에게 혼나는 게 훨씬 편리하고 빠른 해결책인 것이다. 게다가 혼내느라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 상대방이지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둘째, 문제 행동이 때로는 아이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가깝게 만드는 ‘유일한’ 장치일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에 부모, 양육자, 선생님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에게는 문제 행동만큼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객관적으로 다른 수단이 있더라도, 이를 아이가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이즈 마케팅도 마케팅이라는 말, 그리고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는 말과 상응하는 개념이다. 부정적인 사유로 인한 관심도 관심이다. 아이는 혼나는 순간에 무관심보다 더 강한 ‘연결됨‘을 느끼는 것이다. 집에서 항상 바빠서 자녀에게 관심이 없던 부모도 아이가 그릇을 깨거나, 크게 울거나, 다른 남매와 싸우면 수초 안에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위에서 언급한 첫째 개념과 크게 다르진 않다. 외로움과 무관심이라는 부정적이고 때론 수치스러울 수 있는 감정을 직접 들여다보기보단 문제 행동을 한번 보이는 것이 아이에겐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문제 행동을 통해 일시적으로 갈등 상황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사실 ‘행동’ 자체가 문제라고 믿게 만들면서 ‘내면의 갈등(internal conflict)’이 궁극적인 문제임을 간과하게 만든다. 여기선 아이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성인들도 내적 갈등 상황에서 흔히 행동화(acting out)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 주지 못한 친구의 연락을 며칠간 받지 않는 것도 행동화이다. 이 경우, 서운함과 외로움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연락을 피하는 행동을 보인 경우이다. 이런 행동화 방어기제는 지속적으로 너무나 흔하게 발동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화의 결과물인 관계의 단절도 너무나 흔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관계의 단절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정신분석학회 2022년 연례회의는 마침 강 건너 보스턴에서 열렸다. 나는 부담 없이 학회휴가를 쓰고 참석할 수 있었다. 처음 가보는 미국정신분석학회 모임이었기에 스타의 팬 사인회에 가는 팬 마냥 기뻤다. 지하철로 다섯 여 정거장을 간 뒤 내려서 보스턴 퍼블릭 가든을 거쳐 봄바람을 맞으며 학회장까지 걸었다. 마침 이 공원에는 영화 굿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서 윌(맷 데이먼 분)과 그의 치료사 션(로빈 윌리엄스 분)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던 호수가 있다. 그 벤치에 두 주인공이 앉기 며칠 전, 둘은 영화 속 진료실에서 격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립한다. 윌이 션을 모욕하면서 공격(행동화)을 하게 되고, 션도 이에 참지 못하고 윌의 멱살을 잡는다(역시 행동화). 관계의 단절이었다. 이 벤치는 회복의 공간이었다. 션은 치료자로서 그 어떠한 관계의 단절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 벤치를 응시하다 보면 나도 모를 미소가 나온다.  


    당시 보스턴 학회에서는 정신분석 케이스를 기술(describe)하는 법에 대해 토의하는 세션이 인상적이었다. 정신분석 교과서나 논문에 실리는 치료 케이스들은 아무래도 실제 치료 과정보다는 치료가 “이렇게 되었으면 더 좋았을” 치료자의 판타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환자의 익명성 보장을 위해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사실 관계를 왜곡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치료자가 무의식인 의도가 반영된 재구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정신치료는 멋지고 깔끔하게 쓰인 케이스 보고서보다 훨씬 더 지저분한(dirty) 과정이다. 재단사에 의해 몸에 맞게 맞춰진 이탈리아 정장보다는 여러 번 옷감을 덧대서 기워 입는 블레이져 팔꿈치 같은 것이 정신치료이다. 재생의 아름다움. 치료자와 내담자와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와해되고 재생된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의 정형화된 관계의 틀(frame)이 깨지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 치료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그것이 아름답건 아니건)를 좀 더 케이스에 잘 담아야 한다는 게 세션의 요지였다. 치료자-내담자 관계의 단절을 회복의 실패로 볼 것이 아니라 더 큰 회복의 기회로 바라봐야 한다. 앞의 개리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진료실 밖 아이-양육자 관계나 커플 간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이번 장 후반부에서는 관계의 단절과 회복과 관련된 신생아 연구를 소개하고 일상의 관계에서 이러한 지식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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