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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조절: "우린 서로가 필요해”

3.2.

    현대 정신 치료에서는 점차 상담이나 분석의 내용보다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치료자-내담자(client)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감정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치료자가 내담자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분석하는 일인(one-person) 심리학보다, 치료자와 내담자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이인 (two-person) 심리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여러 신경과학의 개념들이 있다. 정신화(mentalization), 상호조절 (co-regulation), 또는 우뇌-우뇌 (right brain-to-right brain) 연결 등이 그것이다. 인간은 상대방과 같은 공간에서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진료실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벤(가명)은 초등학교 고학년 환아였다. 그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벤은 나와의 첫 정신치료 세션 내내 카메라에 나타나지 않았다. 코비드(Covid-19) 팬더믹이 끝난 이후 보스턴 지역 공립학교들은 다시 교실을 열었다. 마스크를 필수로 써야 하는 교칙이 없어진 시점이었다. 그러나 벤은 학교로 복귀한 이후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벤은 점심시간이면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선생님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 또래 학생들과 함께 앉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식사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학교를 가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벤의 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그를 태우고 등하교를 도와야 했다. 일찍 출근을 해야 했던 벤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눈치를 봐야 했다. 코비드 이후에 등교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벤의 회피 반응은 극단적인 형태를 띠었다.  


    벤의 불안 증상에 항우울제를 소량 사용하는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정신치료를 진행했다. 벤은 경제적 상황 때문에 병원에 직접 오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증상으로 인해 대중교통 이용이 불가했다. 상담은 원격으로만 이루어졌다.  


    “오늘은 더 못하겠어요.” 


    보통 45분 길이로 정해져 있는 치료 세션을 벤은 20여 분밖에 견디지 못했다. 벤은 첫 2달여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벤은 본인의 감정을 기술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기분(mood)에 대해 묻는 질문들에 말을 흐렸다. 벤의 아버지가 관찰한 아이의 행동 패턴을 기반으로 그가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추측했다. 벤은 마스크와 후드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채 카메라에 몇 초간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치료자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해 심히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지지부진한 환자 평가와 치료 때문인지 나는 벤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벤을 만날 때마다 나 스스로가 능력이 부족한 치료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치료하는 환아를 만나기 싫다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치료에 굉장히 중요하다. 동시에 그 알아차림은 고뇌를 불러 일으켰다.


    아야렛 바카이(Ayelet Barkai) 선생님은 벤의 치료를 돕는 지도 전문의셨다. 정신분석가인 바카이 선생님은 위탁 양육 아동들에 대한 상담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A Home Within 프로그램의 공동 디렉터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관계(relationship)에서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을 상담한 경험이 많으셨던 바카이 선생님에게 벤의 치료에 대한 도움을 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신분석 치료 세션과 같이 바카이 선생님은 정해진 슈퍼비전 시간에 1분도 늦지 않고 거기에 계셔주셨다. 그렇기에 슈퍼비전에 몇 분 늦게 되면 내가 슈퍼비전을 짧게 받고 싶은 무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했다.  


    선생님은 항상 푸근하게 나를 맞아주셨는데, 특히 벤을 치료하면서 내가 경험한 많은 불확실성과, 낮아지는 치료자로서의 자존감, 불타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던 치료 동기로 인한 불안을 잘 다잡아 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벤에 대한 정신분석적 가설을 횡설수설하듯 말해도 그걸 심각하게 듣고 계시다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가설로 나에게 돌려주셨다. 그러고 보면 좋은 정신치료 슈퍼비전 자체가 상호조절의 과정이다. 혼자 고민해도 보통 안심되지 않는 마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 이후 쉽게 진정되곤 한다. 


     “벤이 느끼는 불안이 너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네가 불안한 걸 수도 있지.”  


     바카이 선생님은 벤이 내가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상황이고, 그 불안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매우 어려운 상황 같다고 말해 주셨다. 실제로 정신치료에 관심이 있던 나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대화를 치료 세션에서 주고받길 기대했기 때문에 벤을 왜곡해서 평가하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의제가 치료실로 무의식 중에 녹아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바카이 교수님은 대단한 분석을 통하거나, 번뜩이는 치료 테크닉으로 아이를 치료하고자 했던 나의 욕심을 내가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렇다고 벤이 집에만 있게 하면 안 되지. 우선 CHA병원 사회복지실에 연락해서 라이드(ride) 지원 서비스로 아이를 진료실로 오게 하자. 우선 그게 시작일 거야. 그리고 너와의 1:1 상황이 생각보다 편한 환경이라는 걸 경험하게 해야겠지. 벤이 무슨 주제의 말을 하건 어떤 형태로 놀던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줘. 진료실에서 앉을 때는 마주 보고 앉으면 벤이 부담스러워할 거 같으니 방향을 틀어 둘이 한 방향을 향하는 느낌으로 앉도록 해봐.” 


    사회복지실은 벤의 상황을 듣고 매주 Uber 왕복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벤은 진료실에 왔고,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상황이 되니 자신이 좋아하는 프라모델 취미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진료실에서의 첫 만남에서는 프라모델 얘기만 45분을 꽉 채워 이어갔다. 벤은 중고로 어떤 프라모델을 찾고 있고, Ebay에서 어떤 경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를 신나게 이야기했다. 이때 벤이 웃는 걸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미소에서 희망을 봤다.


    “감정을  기술하지 못한다고 감정이 부재한 건 아니지. 네가 ‘너 지금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라고 벤이 감정을 명명할 수 있게 도와줘봐. 자신의 상황을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보고 감정을 기술하는 건 생각보다 대뇌 피질이 관여하는 고위 기능이기 때문이지. 네가 정신화(mentalization) 작용을 치료자로서 벤에게 제공(supply)하는 느낌으로 해봐.” 


    바카이 선생님은 환자와 한 공간에서 '진정으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그러면서 포나기(Fonagy)와 탈제이(Target)가 이끄는 정신화 기반 정신치료(mentalization-based psychotherapy; MBT)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고 권유해 주셨다. 이는 프로이트가 기술한 신경증(neurosis) 환자들보다 소아 발달 단계 중 더 이전 (만 3세 이전, 오이디푸스기 이전)부터 어려움을 겼었던 환자들 치료에 초점을 맞춘 치료법이다. 정신화(Mentalization)란 타인이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다른 말로는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도 부른다. 




    효과적인 상호조절(co-regulation)은 정신화(mentalization) 기능이 존재할 때 발생한다. 벤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전제에 동의하고, 그 다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자리에 있어야 상호조절이 효과적으로 일어난다. 나는 벤이 진료실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내 안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서 명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와 벤은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가 매우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를 이끌어 가야 했다. 벤은 자신의 내면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풀어낼 상황이 아니었다.

    

    참고로, 내면에서 떠오르는 감정과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이야기하는 기법을 정신분석에서는 “자유 연상”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 또한 충분한 자기 조절 기능을 필요로 한다. 프로이트는 이 자유연상을 정신치료의 기본 요구사항처럼 기술했지만, 현대 정신분석에서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치료자 앞에서 자유 연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치료의 목표라고 보기도 한다.  


    정신화 기능이 부족한 벤을 위해 내가 한 일은 그를 위해 최대한 감정을 명명해 주는 것이었다. 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프라모델 중 특히 형태가 비대칭이거나, 상처가 나거나, 전형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벤은 자신마저 "그 장난감들을 좋아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해야 한다“는 보통 감정보다는 논리에 입각한 발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벤이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누군가에게 생김새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참 슬플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에게 지지받지도, 지킴 받지도 못한다면 외로울 거 같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감정에 대해서 언급할 때 나는 평서문을 주로 쓴다. 아이에게 굳이 응답하지 않은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동시에 확신에 찬 문장보다는 불확실성을 담은 “-같다” 혹은 "-처럼 들린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어떤 상황에서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굳이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더라도, 장난감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넘쳐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은 매 순간을 (종류 및 강도는 다르겠지만) 어떤 감정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자기 조절이나 상호조절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즉,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는 어떤 사실이나 명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단 그 순간을 채우고 있는 주된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차분함을 되찾는 데 효과적이다.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내 기분”에 대해서는 확신 있게 말하되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속상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말할 때는 추측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너는 외로웠던 거야”보다는 “너는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라는 표현이 알맞다. 앞에서 언급한 정신화 기능처럼, 이러한 표현은 ‘나와 너의 감정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네가 어떤 내적 경험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어'라는 점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키고 싶은 관계에 놓인 두 사람 사이엔 적어도 ‘감정에 대한 소재가 나오면 존중해서 듣자’ 정도의 황금률을 미리 정해 놓으면 좋겠다. 이러한 사전 작업이 감정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 (예를 들면 “내가 열받았는데 네가 보태준 거 있어?”)의 출현을 예방할 수 있다.  


    자기 조절뿐만 아니라 감정 표현이 가지는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마크 브래킷(Marc Brackett) 박사의 저서 Permission to Feel (한국어 제목: 감정의 발견)에는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나열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파트는 다름 아닌 하드커버 겉면 바로 안쪽 면이었다. 거기에는 평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감정 표현 형용사가 “Mood Meter”라는 제목의 표로 열거되어 있다. 많은 감정 단어를 사용하고 내 삶의 상황들과 자주 연결 짓는 연습을 할수록 자기 조절 능력이 개발되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정신치료를 하면서 나는 주된 역할 중 하나가 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언어화하는 것이다. 이 작업에 (그리고 현실 관계에) 있어서 Permission to Feel 책의 어휘들이 많은 도움이 된다.  “그 상황에서 네가 굉장히 외롭고 좌절스러웠던 것처럼 들린다.” 환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절레절레 흔들며 나의 발언을 고쳐주기도 한다. 이렇게 함께 감정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면서 진료실에서 환자는 치료자와의 상호조절 순간을 경험한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압도되지 않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된다.     


    다행히 요즘 아이들이 많이 접하는 유명 서적이나 TV 매체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사용이 자주 보인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인 Diary of a Wimpy Kid 책 시리즈를 나는 참 좋아한다. 아이들이 진료실에서 추천하는 책이나 영상은 되도록 챙겨 보려고 노력 중이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어떤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접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이 Diary of a Wimpy Kid는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한 아이가 학교 및 가정에서 경험한 감정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다. 유치하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진솔한 감정의 흐름을 굉장히 즐겼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분명 삶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을 터이다. 그러한 경험과 동반되는 감정, 충동, 그리고 판타지까지도 언어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언어화에 필요한 세세한 재료까지 던져주는 아주 친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교과 과정보다 유익하면서도 초등학생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믿는다 (출판사와 저자는 이해관계없음) 



 

   상호 조절은 평생의 과업이다. 나도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항상 노력을 한다. 우선 상호조절을 위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큰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배우자 둘은 가정에서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회복해서 (싸우면서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집 밖 환경에서 고된 시간을 버텨낼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의 의사소통에서 한 명이 회피 신호를 보내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일 때, 거기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상대방이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 어떨까? 배우자가 한숨을 연달아 쉴 때는 말하는 내용보다는 '상대방의 고뇌 상황‘ 자체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격앙된 상태에서의 대화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점점 달아오름을 인지하는 그 순간, 차분함을 회복하는 걸 최우선의 목표로 해야 한다. 잠시 5분이라도 그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 그 목표 달성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잠깐 우리 지금 빨강 경보이다. 좀 차분해지고 다시 얘기해 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치료에서 이렇게 관계의 상태를 관조하듯이 점검하는 걸 메타(meta) 대화라고 한다. 이런 대화가 부담 없이 가능한 관계가 상호 조절 및 상호 존중의 정점에 있는 이상적인 형태라고 본다.   


    나는 격앙된 순간 잠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선호하고, 배우자는 내가 격앙된 순간 목소리 크기를 높이지 않는 걸 선호한다.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효과적인 상호조절 전략을 찾아내는 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배우자는 내가 다툼의 상황을 잠시 피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생각하기보단 자기 조절의 한 방법으로 인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언성을 높이는 것에 높은 액수의 벌금을 셀프 책정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게 되었다). 결혼 8년 차가 넘어가니 서로의 발작 버튼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어떤 버튼을 누르면 상호조절이라는 결혼 생활의 중요한 목표가 얼마큼 무너져 내리게 되는지를 점점 더 이해해 나가고 있다.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러브레터에 쓰는 클리쉐(cliche) 표현을 들어봤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표현에서 관계에서의 상호조절을 읽어본다.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고를 때 두 사람 사이에 상호조절 기능이 잘 작동하는지 꼭 생각해 보면 좋겠다.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 더 쉽게 차분해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더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잘 할 수 있다면, 상호조절 측면에서 좋은 궁합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호조절이 평생의 '과업'이면서 '놀이'라는 것이다. 이 상호조절 '게임의 규칙'은 서로가 동의하면 지속적으로 변경해 나갈 수 있다. 지나치게 뜨거운 순간을 빠르게 식히고, 차분한 상태에서 서로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발견해 나갔으면 한다.   


    이 장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김동철 선생님은 멜빵 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즐겨 입으시던 도인 같은 분이셨다. 우리를 체벌로 다스리는 대신 "명상”을 가르쳐 주셨다. 당시에 눈을 감고 10여 분을 배꼽 주변에 손을 모으고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괴로웠다. 어찌나 괴로웠는지 '그냥 때려주세요’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 우리가 말도 안 되는 문제 행동을 일으키고 선생님의 말을 안 들은 것은 자기 조절 부족 때문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진정 우리가 필요한 건 체벌이 아닌 "자기 조절 기술”이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상호 조절)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조절하고 차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학업 이상의 것을 선물해 주신 참 좋은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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