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절
♪ Christopher Tin - Sogno di Volare
현대 정신 치료에서는 점차 상담이나 분석의 내용보다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치료자-내담자(client)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감정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치료자가 내담자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분석하는 일인(one-person) 심리학보다, 치료자와 내담자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이인 (two-person) 심리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여러 신경과학의 개념들이 있다. 정신화(mentalization), 상호조절 (co-regulation), 또는 우뇌-우뇌 (right brain-to-right brain) 연결 등이 그것이다. 인간은 상대방과 같은 공간에서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진료실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벤(가명)은 초등학교 고학년 환아였다. 그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벤은 나와의 첫 정신치료 세션 내내 카메라에 나타나지 않았다. 코비드(Covid-19) 팬더믹이 끝난 이후 보스턴 지역 공립학교들은 다시 교실을 열었다. 마스크를 필수로 써야 하는 교칙이 없어진 시점이었다. 그러나 벤은 학교로 복귀한 이후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벤은 점심시간이면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선생님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 또래 학생들과 함께 앉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식사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학교를 가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벤의 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그를 태우고 등하교를 도와야 했다. 일찍 출근을 해야 했던 벤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눈치를 봐야 했다. 코비드 이후에 등교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벤의 회피 반응은 극단적인 형태를 띠었다.
벤의 불안 증상에 항우울제를 소량 사용하는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정신치료를 진행했다. 벤은 경제적 상황 때문에 병원에 직접 오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증상으로 인해 대중교통 이용이 불가했다. 상담은 원격으로만 이루어졌다.
“오늘은 더 못하겠어요.”
보통 45분 길이로 정해져 있는 치료 세션을 벤은 20여 분밖에 견디지 못했다. 벤은 첫 2달여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벤은 본인의 감정을 기술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기분(mood)에 대해 묻는 질문들에 말을 흐렸다. 벤의 아버지가 관찰한 아이의 행동 패턴을 기반으로 그가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추측했다. 벤은 마스크와 후드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채 카메라에 몇 초간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치료자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해 심히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지지부진한 환자 평가와 치료 때문인지 나는 벤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벤을 만날 때마다 나 스스로가 능력이 부족한 치료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치료하는 환아를 만나기 싫다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치료에 굉장히 중요하다. 동시에 그 알아차림은 고뇌를 불러 일으켰다.
아야렛 바카이(Ayelet Barkai) 선생님은 벤의 치료를 돕는 지도 전문의셨다. 정신분석가인 바카이 선생님은 위탁 양육 아동들에 대한 상담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A Home Within 프로그램의 공동 디렉터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관계(relationship)에서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을 상담한 경험이 많으셨던 바카이 선생님에게 벤의 치료에 대한 도움을 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신분석 치료 세션과 같이 바카이 선생님은 정해진 슈퍼비전 시간에 1분도 늦지 않고 거기에 계셔주셨다. 그렇기에 슈퍼비전에 몇 분 늦게 되면 내가 슈퍼비전을 짧게 받고 싶은 무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했다.
선생님은 항상 푸근하게 나를 맞아주셨는데, 특히 벤을 치료하면서 내가 경험한 많은 불확실성과, 낮아지는 치료자로서의 자존감, 불타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던 치료 동기로 인한 불안을 잘 다잡아 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벤에 대한 정신분석적 가설을 횡설수설하듯 말해도 그걸 심각하게 듣고 계시다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가설로 나에게 돌려주셨다. 그러고 보면 좋은 정신치료 슈퍼비전 자체가 상호조절의 과정이다. 혼자 고민해도 보통 안심되지 않는 마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 이후 쉽게 진정되곤 한다.
“벤이 느끼는 불안이 너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네가 불안한 걸 수도 있지.”
바카이 선생님은 벤이 내가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상황이고, 그 불안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매우 어려운 상황 같다고 말해 주셨다. 실제로 정신치료에 관심이 있던 나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대화를 치료 세션에서 주고받길 기대했기 때문에 벤을 왜곡해서 평가하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의제가 치료실로 무의식 중에 녹아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바카이 교수님은 대단한 분석을 통하거나, 번뜩이는 치료 테크닉으로 아이를 치료하고자 했던 나의 욕심을 내가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렇다고 벤이 집에만 있게 하면 안 되지. 우선 CHA병원 사회복지실에 연락해서 라이드(ride) 지원 서비스로 아이를 진료실로 오게 하자. 우선 그게 시작일 거야. 그리고 너와의 1:1 상황이 생각보다 편한 환경이라는 걸 경험하게 해야겠지. 벤이 무슨 주제의 말을 하건 어떤 형태로 놀던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줘. 진료실에서 앉을 때는 마주 보고 앉으면 벤이 부담스러워할 거 같으니 방향을 틀어 둘이 한 방향을 향하는 느낌으로 앉도록 해봐.”
사회복지실은 벤의 상황을 듣고 매주 Uber 왕복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벤은 진료실에 왔고,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상황이 되니 자신이 좋아하는 프라모델 취미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진료실에서의 첫 만남에서는 프라모델 얘기만 45분을 꽉 채워 이어갔다. 벤은 중고로 어떤 프라모델을 찾고 있고, Ebay에서 어떤 경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를 신나게 이야기했다. 이때 벤이 웃는 걸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미소에서 희망을 봤다.
“감정을 기술하지 못한다고 감정이 부재한 건 아니지. 네가 ‘너 지금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라고 벤이 감정을 명명할 수 있게 도와줘봐. 자신의 상황을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보고 감정을 기술하는 건 생각보다 대뇌 피질이 관여하는 고위 기능이기 때문이지. 네가 정신화(mentalization) 작용을 치료자로서 벤에게 제공(supply)하는 느낌으로 해봐.”
바카이 선생님은 환자와 한 공간에서 '진정으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그러면서 포나기(Fonagy)와 탈제이(Target)가 이끄는 정신화 기반 정신치료(mentalization-based psychotherapy; MBT)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고 권유해 주셨다. 이는 프로이트가 기술한 신경증(neurosis) 환자들보다 소아 발달 단계 중 더 이전 (만 3세 이전, 오이디푸스기 이전)부터 어려움을 겼었던 환자들 치료에 초점을 맞춘 치료법이다. 정신화(Mentalization)란 타인이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다른 말로는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도 부른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