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삼월도, 사월도, 시간은 초조한 긴장감 속에 그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비자가 나왔건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국 비자를 발급받으면 발급받은 날짜로부터 30일 내에 영국에 입국해 거주증(BRP)으로 바꿔야 하는 임시 비자인 Vignette를 여권에 붙여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다시 끊기에도 언제 취소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기 Vignette 기한을 늘릴 수 있는 연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유일한 영국 비자센터가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은 상태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력한 마음도 불쑥 찾아오곤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평온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이토록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하루 한 번이라도 외출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역마살이 껴있던 나는 코로나 이후 일주일에 한 번 나갈까 싶을 정도로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우리 집에 두 달가량 머물게 되신 할머니까지 계시다 보니 행여나 나의 불필요한 외출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까 무서웠다.
그렇게 2020년의 봄과 여름은 유화 색칠하기, 집 앞 초등학교 인조잔디구장에서 친오빠와의 축구, 그러다 동네 중학생들이랑 하루가 멀다 하고 하게 된 축구(풋살화까지 사버렸다), 그리고 가족들과의 삼시 세 끼로 가득히 채워졌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동안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여전히 방도 없이 본가의 거실에서 자곤 했지만 비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속절없이 보내는 대신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좋은 기회로 보컬 트레이닝을 나가게 되었다. 또 그 기회를 발판 삼아 삼 개월가량 고등학교 특강에도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327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삼 개월의 고등학교 토요일 특강 계약이 끝나는 날짜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지나고 나는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한 채, 역시나 눈물이 고였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마스크와 안경을 쓰고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으며 고되고 지루한 열두 시간의 비행을 마쳤다. 한산한 공항, 빈자리가 많았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한 열을 다 차지하지는 못할 정도로 어느 정도는 채워진 비행기 좌석들. 대부분의 승객들은 여행객이 주를 이루던 예전과 달리 생업이나 유학생, 가족 단위의 사람들로 보였다. 나 또한 그들 틈에 끼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조금, 설렘 조금을 안은 채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