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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an 17. 2019

갑질타파, 직장생활 좀 나아지셨나요

직장갑질119와 함께 한 두 달, 일상의 민주화는 언제쯤


야! 사장인 내가 월급 주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야
아들 같고 조카 같고 그래서 내 선에서 마무리 하는 거야
--
불타오르네


목소리만 들어도 신경질적인 직장상사가 연상되는 대사에 이어 강한 비트와 함께 "Fire"라는 가사가, BTS의 <불타오르네>가 울려퍼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


뛰는 갑 위에 나는 을 만들기 프로젝트
갑질타파 시즌2


11월 8일부터 지난주까지, 두 달여 간 목요일 저녁 7시 30분이면 스튜디오를 메우던, 그리고 라디오와 유튜브를 통해 청취자들에게 가닿았던 소리다. 오늘부터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헛헛하다. 



갑질타파는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 직장갑질119가 함께 만드는 코너다. 코너제목과 소개 멘트에서 알 수 있듯이, 온갖 갑질 사례를 고발하고 을(乙)들에게 대처방법을 소개하는, 그리고 제도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다뤘다. 2017년 11월, 직장갑질119가 출범하고 약 한달 뒤인 12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시즌1이 진행됐고(당시엔 격주), 시사자키 미니 개편을 맞아 2018년 11월부터 다시 두 달간 시즌2가 방송됐다. 


언시생 시절이던 2017년에도 나는 이 코너를 좋아했다. 노동이슈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직장갑질119는 특히나 조직화된 노동조합의 손이 가닿지 않는, 그래서 더욱 갑질에 노출되기 쉬운 노동자들이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언덕이었다. 오죽하면 후원계좌 열리자마자 후원회원 되어보자는 글까지 쓴 적 있을까. 


시즌1이 방송되던 시기는 직장갑질119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초창기이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새로웠던 유형의 갑질을 고발하는 성격의 방송이 많았다. 현안이었던 간호사 태움, 겨울철 축제이자 남북평화무드의 시발점이었던 평창올림픽의 노비계약서,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CCTV 갑질,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폭언/욕설/성희롱 등등.


갑질타파 시즌1 방송내용


시즌2가 시작된 2018년 11월은 직장갑질119가 이미 출범 1주년을 맞이했고, 꾸준한 갑질 고발활동을 벌인 이후였다. 그러다보니 담당PD로서 나의 고민은 


새롭지 않은 내용을 어떻게 잘 들리게 할 것인가

였다. 첫 방송은 마침 터져나온 양진호 갑질 이슈에 얹힌 덕분에(?) 폭언/욕설/폭행을 묶어 '우리 회사 양진호'로 내보낼 수 있었다. 형식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방송 중간에 녹음파일을 트는 시도도 해보았다. 반응은 좋았다(시즌2를 통틀어 기사/영상 모두 최고 조회수). 하지만 직장갑질119에 제보된 갑질사례와 유사하면서도 폭발력 있는 사회이슈가 매주 터져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로움에 대한 욕심은 버리고, 대신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야기를 잘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지적됐던 문제들이라고 해서 해결된 것들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였어도, 그리고 해결의 시도가 있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달할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즌1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네요"의 컨셉이었다면 시즌2는 "아니 이게 어떻게 말이 되냐, 아직도 이러고 있다"라고나 할까


갑질타파 시즌2 방송내용


그렇게 두 달을, 지난 1년간 직장갑질119에 축적된 자료와 방송이 시작된 이후로도 꾸준히 제보되는 사례들에 파묻혀 살았다. 새로움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도 항상 살펴봤다. 그런데 매일 같이 오픈채팅방에 올라오는 피해사례들은 제보자만 바뀌었을 뿐 정말 유사한 내용들의 반복이었다. 임금체불, 폭언, 협박, 성희롱, 부당해고 등등


 갑(甲)들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세상의 갑(甲)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먼저 제도의 문제. 법이 노동자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법이 지켜주지 않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노조로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다. 故김용균씨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재로 죽어나가도 사업주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게 '합법'이다. 불안정한 지위로 폭언/폭행/성폭력에 시달리는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늘어난 것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 일이다. 부족한 법이나마 잘 지키면 모르겠는데 근로감독관들이 갑질사장의 편에 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법이 지켜주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노조, 노동조합 뿐이다. 그런데 지금 충분한 교섭력을 가지고 있는 노조, 다시 말해 노조 같은 노조가 있는 사업장들은 대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96년 노동법 날치기 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노동조합을 탄탄하게 조직했던 곳들이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온갖 갑질의 온상이 되기 쉬운데,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쯤되면 직장갑질119에 1년간 들어온 제보가 2만 건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다. 


법과 노조 조직률이 제도의 문제라면, 갑들이 변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감수성의 문제다. 임금체불 등의 근로기준법 위반 갑질이 아니라 이른바 '괴롭힘' 갑질, 폭언/폭행/성폭력/인격모독/사적지시 등은 근무시간이 얼마고 통상임금이 얼마고 등을 따져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하면 안된다'는 인식만 있으면 바로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갑질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노동자를, 하급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 이러니 아무리 언론에서 갑질을 고발해봐야 소용 없는 것이다. 



결국 오늘도 상당수 을(乙)들은 갑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따낸 직선제 민주주의가 2016년 촛불집회와 2017년 장미대선을 거쳐 무르익었다면 


광장이 아니라 일터에서 찾아야 할 민주주의는
아직도 꽃 한번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갑질119의 활동은 소중하다. 100명이 넘는 자원활동가들이 상담, 법률자문을 상시적으로 지원하고 뭉쳐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직종은 뭉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다. 최근에도 대학원생119콜센터119가 연달아 문을 열었다. 그 이야기까지 방송에 담고 싶었지만 8회로 약속된 시즌2를 이미 1회차 연장한 뒤였기에 방송에 목소리를 내주신 두 분께 차마 2주 더 하자는 말씀을 드리진 못했다. 그렇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직장갑질119와 함께 만든 갑질타파 시즌2는 지난주 목요일, 막을 내렸다. 


갑질타파 시즌2 마지막 방송분


갑질타파 방송 준비는 여러모로 힘든 작업이긴 했다. 넘쳐나는 사례들, 하나 같이 억울한 일들 뿐인데 그 중에 어떤 사례를 소개하고 어떤 사례는 지나칠 것인가.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청취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의 폭이 넓어질까. 새로움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고는 하지만 너무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듣는 사람들이 질려하지는 않을까, 등등을 고려해 원고 초안을 쓰면 직장갑질119의 박점규 운영위원, 조은혜 노무사 두 분이 직접 내용을 검수하며 사례의 제보자에게 디테일을 확인하고, 법적 지식을 보충해주셨다. 


나야 방송이 본업이니 원고 제때 못써서 야근하고 골머리 좀 앓더라도 괜찮지만, 두 분은 본업에 직장갑질119 활동에 매주 방송까지 소화하시느라 참 고생하셨다. 맘 같아서는 무한정 괴롭히고.. 아니 방송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어쨌든 시즌2의 완결을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갑질공화국의 수많은 갑(甲)들이 어느날 갑자기 회심하지 않는 한, 어차피 또 만나게 될테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 직장갑질119는 이렇게나 좋은 단체입니다.

후원합시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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