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PD Feb 12. 2019

조선일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상파 시사라디오가 편향됐다구요?



어제 아침 출근준비를 하며 포털 뉴스란을 훑다보니 '지상파 라디오'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조선일보 기사였다.



지상파 라디오 시사가 죄다 정부비판적이지 못하고 민주당에 우호적이라고 써있었다. 그리고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김용민의 정치쇼>가 특히 심하더라는 것이다. 다른 방송은 모르겠고, 우리 방송도 그렇다고? 근거는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의 <박근혜-문재인 정부 시기 지상파 시사프로그램 평가 연구>라는 보고서였다.


빡침은 성실함의 동력이다. 오랜만에 (졸업한지 6년 됐지만) 대학원생의 피가 끓었다. 냅다 보고서를 다운받아 읽어봤다. 이 보고서에서 활용한 편향성 지수는 기사에도 인용된 것처럼 '정부 비판성'과 '민주당 지지 성향' 두 가지이다.


출처: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그런데 '정부비판성' 안에 이미 여당이 포함되어있다. 즉 박근혜 정부 시기엔 새누리당, 문재인 정부 시기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평가한 점수가 저 지수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구진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라는 지수를 별도로 만들었다.

     

지금 공개된 연구보고서에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턴 관심법이다.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문재인 정부보다 낮았다. 당시 정부여당, 즉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민주당 정치인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나왔다. 그 비판의 목소리를 모조리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잡았거나, 조금 좁히더라도 대중적인 비판 여론이 있는 사안에서 민주당 인사의 입을 빌린 경우를 모두 이 지수에 포함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결국

지상파 라디오는 항상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바로 이 도표에서처럼 말이다.  


출처: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문제는 기준이다. 방송의 ‘편향성 지수’라는 건 지금껏 학계에서 합의된 바가 없는 지표로 보인다. 그러면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정량평가(출연진 출신정당 분석)와 정성평가(편향적인 멘트)를 근거로 제시한다. 민주당 의원이 많이 출연했고, 민주당 의원에 편향적인 멘트를 많이 했다는 뜻이다. 편향적인 멘트라는 기준부터 살펴보자.


출처: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공개된 보고서에까지 언급한 걸 보면 그나마 확실한 것들을 뽑아놨을 텐데, 여전히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라디오 진행자는 인터뷰이의 멘트에 맞장구를 치거나, 의미를 요약하는 방식으로 멘트를 반복할 때가 있다. 이런 맥락까지 고려해서 분석하는 것은 제작진이나 평소 애청자 수준의 덕후라면 모를까, 샘플링된 인터뷰 다시듣기를 반복한 사람들(=연구보조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적인 평가가 어렵다면 정량평가는 어떨까. 보고서는 정치인들 중에 민주당 출신이 많다는데 '주목'한다.


출처: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이니 분석도 그럴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는 전수조사가 아니라 샘플링 된 결과다. 물론 너무 많으니까 전수조사는 못했겠지, 이해는 된다. 그런데 라디오는 데일리라 어떤 시기, 어떤 요일을 하느냐에 따라 출연자도 진행자 멘트의 성격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특히나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라면,


시사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진은
기계적 중립을 강박적으로 고려한다


반론보장도 중요하고, 토론 아이템 자체가 방송으로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토론이 성립하지 않는 상황은 1) 마이크를 주는 것 자체가 사회에 해악인 경우 (예컨대 지만원), 2) 한쪽이 인터뷰를 거절한 경우다.


정치인들은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해주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논쟁적 이슈가 터져나오면 유불리에 따라 인터뷰에 적극 나서기도, 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논쟁적 이슈임에도 토론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엔 당연히 진행자가 반론질문을 여러 차례 던진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이쿠 민주당 출연자가 이렇게 많네요, 민주당에 우호적이십니다 땅땅땅, 이래버리면 지나가던 (구)대학원생에게 비웃음일이다. 심지어 한국당 출연자가 아니라 다른 야당 출연자들까지 합치면 민주당 의원의 출연비중은 50% 겨우 넘는 수준이다. 이 보고서의 프레임은 민주당 지지가 되지 않으려면 한국당지지 성향이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게 지금의 정치지형에서 ‘공정한’ 판단인지는 의문이다.     




또 한 가지 웃기는 지점은 ‘숙의성’과 ‘정론적 프로그램’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 연구보고서에서 숙의성에 제일 후한 점수를 받은 프로그램은 <김현정의 뉴스쇼>였고 처음에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김현정의 뉴스쇼>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따끈따끈한 당사자성, 이슈의 핵심 논란으로 바로 파고들어가는 힘이다. ‘숙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좀 재미가 없어도 심층적으로 이슈를 다루거나, 솔루션 저널리즘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 아닌가. 뭐지 싶어서 보고서를 훑어보니 숙의성 판단의 기준이 이렇게 써있다.


출처: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일견 타당해보일 수는 있다. 아예 한쪽 입장만 주구장창 전달하는 건 누가 봐도 숙의는 아니다. 그런데 다양한, 아주 다양까진 아니어도 양쪽 입장을 모두 전달한다고 ‘숙의’가 될 수 있는가. 쉽게 말해 지만원의 주장과 5.18 재단의 주장을 모두 다루면 숙의, 친박집회와 촛불집회를 모두 다루면 숙의, 비정규직은 죽어나가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과 사람이 일하다 죽으면 안되지 않냐는 입장을 모두 다루면 숙의인가. 팩트도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의혹/논란이 벌어졌을 때 그게 핫하다는 이유만으로, 공론에 대한 책임감 따위 없는 달변가들이 편 나눠서 이러쿵저러쿵 썰을 풀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건 시사 프로그램이라기 보다는 프로레슬링 중계에 가깝지만 어쨌든 '다양한 입장이 전달'된 것이니 이 보고서의 기준으로 보면 ‘숙의성’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편향이고 숙의고 간에 이 보고서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연구책임자는 조선일보 칼럼니스트고 이 연구 자체가 조선일보 발주로 시작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보고서에서 무리한 결론을 내린 것이 참 공교롭다.



그렇다고 이 보고서 전체에 의미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니다. 기준이 애매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같은 기준’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방송사간, 프로그램간 비교의 근거로 활용할 수는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일보 기사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김용민의 정치쇼>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비교할 때 친정부-여당편향이 존재한다/했다는 것이다.


출처: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이 부분에 대해선 아마 이 바닥의 제작진들이나 청취자들이나 큰 이견이 없을 수 있다. 두 프로그램의 높은 청취율을 보면 그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허술한 기준과 납작한 수준의 지표로 결론이 도출됐다 하더라도 연구진이 어쨌든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무지막지하게 고생했을 대학원생들에게 경의와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20대 남성 저격한 중앙일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