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똑같이 계단에 눈이 닿아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걸 본다. 누군가는 계단 옆 화단에 있다 사라진 벚꽃나무를 그리워할 것이고, 누군가는 계단 앞에서 우유팩을 차고 놀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계단 앞에 놓인, 그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휠체어를 본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가려진 것은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계단을 보고 휠체어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연결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4월 20일과 마포대교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 4월 20일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마포대교 위에서 벌어진 장애인 이동권 투쟁 시위다.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요즘엔 예쁜 굿즈가 따라오는 책이라는 답도 가능하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고전적인 답은 ‘경험을 넓혀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특히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모른다. 예컨대 2017년 기준으로 장애인의 거의 40%가 초등학교에서 학력을 마치고,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 마치는 비율도 55%에 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하철 역사 계단에 큼지막하게 설치돼있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며 움직이던 휠체어 리프트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사라진 걸까. 조현병 운운하는 강력범죄가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되는데 왜 어떤 전문가들은 정신장애인의 강제입원조차 근본적인 해답이 아니라고 하는 걸까.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장애인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원영이라는 저자는 소중하다. 2018년 출간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는 낯선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장애아를 출산한 커플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 일어났고, 급기야 법학자들은 이런 소송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른바 ‘잘못된 삶’ 소송이다. 2016년 일본에선 장애인 시설에 한 남성이 침입해 흉기로 19명의 장애인을 살해하고 26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는 심지어 장애인을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매력은 낯설거나 엽기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된 삶으로 치부받기 쉬운, 소위 ‘실격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삶을 써내려 갈 수 있을지, 일본의 장애인 학살과 8년 전 나경원의 장애 아동 목욕 봉사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문제시’되는지 등등 김원영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적극적인 변론을 전개한다.
지난 달 출간된 <희망 대신 욕망>은 바로 그 변론에 나선 대리인이자 당사자이기도 한 인간 김원영의 사유가 어떤 경험들로 담금질 되어 왔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새로 쓴 책이 아니라 2010년 출간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책의 개정판이다. 날마다 새로운 트렌드가 밀려오는 시대에 9년이 지난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다. 읽어보니 웬걸, 올해 처음 나온 책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 지난 9년 간 사회가 변한 듯 하면서도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체장애로 15세까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던’ 김원영은 1980년대에 태어났다. 2017년, 우리는 2000년대에 태어난 이들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호소하는 부모들을 보았다. 2000년대 중반, 마포대교에서 벌어진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은 노동자들의 공장투쟁도 다녀봤던 나에게 ‘무시무시함’의 기억을 남겼다. 그 당시 쇳소리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를 때리던 구호는 2019년에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
두 번째,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김원영의 글에 담긴 이야기가, 그의 경험과 사유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희망 대신 욕망>은 김원영의 삶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돼있다. 한 마디로, 지체장애를 가진 김원영이라는 사람이 사회와 갈등하고 화해하고 교섭해나가는 과정을 풀어낸 자전적 생애사다. 작은 방 안에서 사회과 부도로 세상을 상상하던 이가 특수학교에 진학해 공연 무대에 오르고, 일반 고등학교에서 소위 ‘일진’과 화장실에서 만나 일기토를 벌일 뻔(!)하고, 행정이 고압적이고 느려터지기로 유명한 대학의 시설을 바꿔내고, 누군가와 (묘사만으로도 심장이 짜릿해지는) 에로스의 순간을 공유하고,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매력적인 이야기다.
다만 <희망 대신 욕망>은 도전했고, 노력했고, 성공했다, 라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제목에도 담겨있듯 그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쿨한 장애인이기 보다는 핫한 장애인,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는 그에게 야한 장애인이 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싫고 혹은 불편하고 이런 것들을 괜찮은 척 하지 않고 내가 괜찮고 나는 굉장히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이런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나의 불만, 불편, 욕심 이런 걸 말할 수 있는 장애인, 이런 걸 의미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김원영은 비장애인들의 장애인 시설 봉사를 바라보는 불편한, 그래서 ‘서늘한’ 시선과 그 와중에도 세계와 연결되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을 넘나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퇴사하면 브런치에 글 쓰고, 외식하면 인스타에 글쓰고, 응원하는 야구팀이 죽을 쑤면 트위터에 욕, 아니 글을 쓰는 텍스트 범람의 시대에 장애인의 욕망을 담은 이야기는 여전히 희소하다. 그 이유는 장애인의 학력 통계에 나와있다. 자기서사를 쓸 기회 자체가 불평등하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인권, 오래된 문제다. 오래된 문제일수록 당연한 거잖아, 그래 해결해야지,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가 쉽게 되겠어? 라는 반응이 나온다. 새롭지 않은 문제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오래된 문제에 새로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야기다.
결국, 우리에겐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김원영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수록, 우리가 모르고 있던 다른 이야기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들리지 않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리라 믿는다. <희망 대신 욕망>은 그가 처음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