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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16. 2019

칼퇴근 판사보다 무서운 건 게으른 기자

조선일보는 노력과 과로를 구분 못하나



어제 조선일보 선우정 기자의 '칼퇴근 판사에게 재판 받기 싫다' 운운한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화제다.

 


이 글은 상당히 악질적이다. 제대로 된 한 사람의 기자 몫을 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수련이 필요했는지를 늘어놓고 그 당위를 설명한다. 언론도 큰 권력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험담과 일종의 직업윤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결론에서는 판사들이 제대로 된 재판을 하려면 칼퇴근을 해서야 되겠느냐 라며, 워라밸을 따지지 말라고 해버린다. 직무전문성을 위한 노력과 목숨을 위협하는 과다한 업무량의 경계를 흐려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며 배우고 성찰하는 것, 당연히 중요하다. 언론이든 공직자든 일종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기에 판단에 실수가 없어야(하다못해 적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과다한 업무량이 직무전문성을 침해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선우정 기자가 판사의 전문성을 다루고 싶었다면
 '일하는 시간'보다 정확하게 직무의 전문성을 드러내주는 단어, 지표를 써야 한다. 예컨대, 4년 전 또 다른 판사의 과로사를 다룬 아래 기사를 보자. 



내가 재판을 받는다면 과로한 판사보다 꼼꼼한 판사에게 재판받고 싶다. 칼퇴근을 하면 재판이 부실해지는가? A라는 재판의 자료를 검토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100시간인데 그걸 40시간만에 해야 하면 부실해질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100시간씩 일하는 판사들이 A뿐만 아니라 B나 C까지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판사들의 과로사이며, 선우정 기자가 우려하는 '부실한 재판'이다. 


즉 지금의 구조에서 부실한 재판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판사의 부족 혹은 사법부 시스템의 문제지,
판사들의 칼퇴근이 아니다 


선우정 기자가 직무전문성을 갖춘, 성실하게 재판을 담당할 판사에게 재판 받고 싶었다면 판사 수를 늘리라고 요구했어야 한다. 경향신문의 이범준 기자는 4년 전에 쓴 기사에서 왜 판사들을 과로사로 내모는 환경이 재판 부실이 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다. 선우정 기자가 보지 못하는,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다른 현실'을 이범준 기자는 보았거나,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피나는 기자훈련을 거치면 뭐하나. 시야가 좁으면 중요한 팩트를 모은 뒤에도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발로 열심히 뛰는 것만큼, 지적으로 게으르지 않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그리고 지적으로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는 일에서 한발짝 물러나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우정 기자가 기술한 '사회부 기자로서의 피나는 훈련(a.k.a. 사쓰마와리)은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한다. 기자에게 필요한 능력을 키워주지만, 부작용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언론사들이 아직도 사쓰마와리를 대체할 교육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집단적인 무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경향신문의 박은하 기자는 선우정 기자의 칼럼에 대해 "가사노동과 육아와 부모 돌봄을 아내에게 전담시킬 수 있는 가부장이거나 시장에서 외주화 가능한 고소득자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번에 판사 과로 문제의 시초가 된, 작년 11월 사망한 '워킹맘' 판사의 삶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심각한 이야기가 많다. (내가 몇 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가까운 사람이 해당 판사의 산재 인정 사건을 대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취재를 하고도 너무 구구절절 아픈 이야기라 안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과연 선우정 기자는 사회부장으로서 그와 관련된 취재를 꼼꼼히 했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다. 


칼퇴근 판사보다 나쁜 것은, 게으른 기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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