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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ul 06. 2019

사과는 피해자에게, 상담은 의사에게

반성문을 왜 페이스북에 쓰나요


요지경 SNS 세상에서는 중앙일보 전직 기자의 '양심고백' 반성문이 한창 논란이다. 자기가 기자일 때 용산 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해서 날조하다시피 한 기사를 썼는데 그 이유는 조직논리가 어쩌고 저쩌고 뭐 아무튼. 


반성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끝까지 그 글의 중심은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 글은 반성문이라기보단 자기연민의 전시에 가깝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잘못을 했느냐보다 그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혹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주기도 한다. 그 나르시시즘으로 수렴되는 에세이 하나로 사람의 삶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스스로 고백한 잘못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그 전직 기자가 전두환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또 트위터에 보니 그 분은 해당 포스팅에 비판적인 댓글은 지우고 있나 본데, 애초에 왜 페이스북에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싶었다면 당사자들을 찾아갔으면 될 일이고, 자기연민과 싸우고 싶었다면 개인상담을 받으셨으면 될 일이다. 지금이라도 이 두 가지 방향을 고민해보시는 게 어떨지.




유사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보니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의 조각들이 맴돈다. 


PD랍시고 일을 하고 있다. 종종 찾아오는 자아실현의 순간을 제외하면, 매일 반복해서 절벽 위의 줄을 타는 기분이다. 나의 발제가, 팀의 결정이, 섭외 전화가, 내가 쓴 원고와 진행자의 질문이, 인터뷰이의 응답이, (줄어들고 있다곤 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사회에 퍼진다. 이상ideal은 사회를 바꾸는 훌륭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지만, 현실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나쁜 콘텐츠를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버겁다. 


나쁜 콘텐츠는 쉽고, 잘 팔린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언론시장엔 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조장하는 자극적인 콘텐츠, 기울어진 운동장을 무시하고 양비론으로 공정의 탈을 쓴, 강자에게 편향된 콘텐츠, 말도 안되는 억지조차도 '일방의 주장'으로 인정하고 반대편 목소리도 들어보겠다며 마이크를 주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시장이 이 모양인데 독소 없는 유기농 같은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나서면 진짜 유기농 식품만큼 대중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이 선은 넘어가지 말자는 기준 위에서 줄을 탄다. 그 기준을 지켜보겠다고 아마도 누군가에겐 싸가지 없는 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직설적으로 투덜대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걸 이유로 누군가는 나에 대한 호감을 잃겠지만, 나쁜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에 폐를 끼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편을 견디는 것이 운좋게 주어진 언론인이라는 자리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윤리다. 


이렇게 써놓은 걸 누가 보면 무슨 공정언론수호를 위해 깃발이라도 펄럭이는 줄 알겠네. 그건 바라지도 않고 진짜 최소한의 선이라도 지키는 사람들이 한두명이라도 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 혼자, 혹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몇몇이서 버둥대봐야 힘만 빠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이 매일의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아직 덜 지친 것 같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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