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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Oct 07. 2019

청년세대론과 이름들의 전쟁

청년팔이 너머를 상상하기

격월간 <오늘의 교육> 2019년 9, 10월호(52호) 기고




지난 8월, 이슈의 중심은 지금은 법무부장관이 된 조국 후보자였다. 후보자로 지명될 당시에는 조국 후보자가 법무부장관으로서 적합하다는 여론이 다수였지만, 자녀의 논문과 장학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자 민심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교육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차별적인 것 아니냐는 목소리에 드라마 <SKY 캐슬>이 소환됐고, 일부 언론과 정치권은 연일 ‘분노한 청년’들을 운운했다.


하지만 조국 후보자 자녀의 논문과 장학금 논란에 가장 분노한 게 청년들일까? KBS 의뢰로 한국리서치가 수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녀 논문-입시특혜 의혹”은 65%의 응답을 기록해 조국 후보자의 청문회를 통해 해명되어야 하는 의혹들 중 1위를 차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대(56%)보다 50대(70%)가 더 높은 응답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자녀에게 조국 후보자와 같은 기회를 줄 수 없었던 부모세대의 자괴감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따랐다. 그럼에도 언론과 정치권은 일부 대학생들의 촛불집회를 경유해 50대가 아닌, 청년들의 분노를 말했다.



청년팔이라는 기시감


어떤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청년이 동원되는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문화연구자 김선기는 《청년팔이 사회》라는 책을 통해 이 기시감의 정체를 풀어낸다. 88만원 세대-77만원세대, N포세대, 촛불세대, 달관세대, 실크세대, G세대 등등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에 붙은 이름은 저자가 “추린 것만” 30개가 넘는다. 그동안 너도나도 청년들의 이름 짓기에 열중해왔다는 뜻이다. 



이름 짓기, 명명은 정치적 행위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에서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했다. 미투 운동이라는 명명이 성범죄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연대를 상징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변혁할 에너지가 넘쳐서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은 것일까 


현실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것은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다. 반면에 한국사회가 청년들에게 붙인 약 서른 개의 이름들은, 결코 정확한 이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2018년 초, 한국을 휩쓸었던 비트코인 열풍은 ‘비트코인 세대’라는 명명으로 이어졌다.


‘헬조선’ 한국사회에서 좌절한 20~30대 젊은 층이 ‘흙수저’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비트코인에 빠져들고 있어 ‘한탕주의’가 우려된다는 기사들이 대거 쏟아졌다. (중략) 새로운 기술은 보통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젊은 층이 비트코인의 주요 이용자처럼 보이는 착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실제로 비트코인과 청년을 연결하는 담론의 유행기가 지나간 이후, 비트코인의 경우에도 연령이 높을수록 평균 투자액이 현저히 높다는 통계 자료가 공개되었다)  (38쪽)


지금 돌이켜보면, 비트코인 열풍은 채 몇 달 가지 못하고 금방 끓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론과 정치권이 비트코인 문제에 청년들을 동원하는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이렇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청년세대를 동원하는 시도는 거슬러 올라가면 2007년 출간된 《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으로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88만원 세대》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치세력이 자기 입맛대로 청년들에게 변화를 주문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진보도 보수도 청년 마케팅


《88만원 세대》는 청년들이 한 달 월급으로 88만원 밖에 받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건 청년들 개인의 탓이 아니라 IMF 이후 한국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부디 짱돌을 들라, 고 주문했다. 청년들이 진보적인 정치주체로서 세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이후 소위 진보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을 통해 반복되더니 급기야는 그들 입장에서 충분히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되지 못한(!) 청년들을 나무라기 시작하는 ‘20대 개새끼론’으로 변형된다. 



20대는 (2008년) 촛불집회에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투표참여율도 낮고,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등등 당시 청년세대를 비판하는데 동원된 근거는 대부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2019년에도 여전히 ‘20대 개새끼론’은 모습을 바꾸어 반복된다. 올해 초 20대 남성들의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하락하자 더불어민주당의 설훈 최고위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 이후에도 그는 ‘오해를 불러 일으켜 죄송하다’고 했을 뿐, 발언을 수정하지 않았다.


소위 진보개혁세력이 이렇게 열심히 청년에 대해 말하는 동안, 보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주로 조선일보가 주축이 되어 제기한 G(글로벌)세대론, 실크(로드)세대론은 청년들이 글로벌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실크로드를 걸을 수 있는 다양한 역량이 있는데, 진보와 386이 그걸 막고 있다며 짱돌을 던지려거든 그들에게 던지라 요구한다. 내용과 방향이 다를 뿐, 결국 진보든 보수든 청년세대를 반대쪽 세력에 대항하는 ‘우리 편 정치세력’으로 주체화하고자 시도해온 것이다. 



청년을 품평하는 사회


이렇게 너도나도 청년들을 자기입맛대로 주체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스레 주체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결과-타자화를 낳는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지금 청년들이 담론팔이에 동원되는 양상은 제국주의 시대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청년에 대해 말하는가. 청년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 아닌 사람들이다. 


저자가 2010~2014년 주요일간지의 청년세대 관련 기사 557건을 분석한 결과, 발화주체가 기성세대인 경우가 509건으로 91.4퍼센트를 차지했고, 청년당사자가 발화 주체로 등장한 경우는 41건으로 7.4퍼센트에 그쳤다. 문제는 발화의 양이 비대칭적이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세대 담론의 특이점은 발화 주체가 주로 전문가보다는 기성세대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이때 발화자는 사실상 ‘청년’ 문제에 전문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인생을 좀 더 살아본 ‘경력’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전문성의 거의 전부다. 주로 각 분야에서 명성을 획득한 기성세대들이 ‘선배/멘토’의 위치에서 ‘후배/멘티’로 상정되는 청년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그 말 걸기는 타자화에 그친다. (220쪽)


말이 통하지 않는 사무실의 상사 빌런들을 떠올려보자. 나는 딱히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 이유를 ‘N포 세대’라는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사람, 내가 이 직업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와 관계없이 ‘나처럼 해야 이 분야에선 잘할 수 있다’를 설교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당연히 그 상사가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리 없다. 


◆ 김선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청년으로 호명되는 이러한 기사들, 아니면 이러한 명칭들을 마주했을 때 (...) 그 청년이 나는 아닌 것 같은 그런 약간 일종의 이상한 껄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 이를테면 취업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프리랜서로 오래 살아가는 청년들이라든지, 아니면 1인가구의 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싶은 청년들이라든지 결혼을 제도적으로 하지 않고 싶어하는 청년들이라든지 혹은 주부라든지 여러 청년의 모습이 청년 담론 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자 인터뷰)



이 일방적인 대상화 속에 다양한 청년들의 모습은 담겨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약 서른 개가 넘는 수많은 ‘청년세대론’에
열광하는 것은 정작 청년들이 아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의 열풍이다. 2018년 11월 출간된 이 책의 저자는 82년생, 한 대기업의 과장이다. 그는 신입사원 교육에서 만난 90년대 생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경험 때문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90년생이 온다》는 출간 직후부터 관심을 모으더니 금세 베스트셀러가 됐고 지난 8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세대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청와대 직원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이 책은 철저히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90년대 생을 이해해보자는 기획이다. 이 책의 열풍을 두고 독립출판 〈월간퇴사>를 제작하는 곽승희는 “우리는 젊은이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으른들’이에요!”라는 태도를 꼬집으며 “권한도 권력도 없는 젊은 세대를 품평하는 이야기는 그만 듣고 싶다”고 지적한다. 나름의 근거를 들어가며 세대론을 설파해온 이들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품평’이야말로 청년들을 일방적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분석한 뒤 팔아왔던 태도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지 않은가.




다시, 함께 쓰는 청년담론


일방적인 품평과 이름 짓기의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그 너머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청년들을 품평해 온 기성세대의 퇴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청년이 청년을 가장 잘 안다’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청년이 ‘안다는’ 바로 그 청년 또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표본’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청년은 고졸 청년을, 대기업 사원 청년은 생산직 청년을, 부유한 부모를 둔 남성 청년은 가난한 부모를 둔 여성 청년을, 진보정당 당원 청년은 일베 청년을 당사자로서 경험할 수도, 잘 알 수도 없다. (284쪽)


청년당사자 운동조차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정치의 모습을 청년들이 알아서 가져오라고 주문하는 것조차 “꼰대질”일 수 있다. 청년세대가 일방적으로 대상화되면서 다른 세대와 분리되고, 분리가 몰이해를 낳고, 몰이해는 의문을 낳고, 기성세대가 다시 청년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악순환 속에서 당사자성‘만’ 강조하는 것은 또다시 청년세대를 분리하는 결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새롭게 청년담론을 쓰는 과정에 “청년만이 주체가 되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노력을 하고 경쟁을 하고 (...) 우리 모두 참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연령과 지위를 넘어, 세대 간의 분리를 넘어 함께 새로운 청년정치를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결론이지만, 청년팔이를 멈출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기성세대에게 필요한 건
《90년생이 온다》가 아니다


상대를 타자화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청년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가지 우려를 덧붙이자면, 적극적으로 소통해보자며 밥 먹자, 술 먹자, 나는 《90년생이 온다》도 읽었으니 우리 대화 좀 해보자고 지나치게 덤벼드는 상사야말로 가장 부담스럽다는 점을 잊지 마시라)


그리고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청소년들은 무지막지한 학습노동에, 청년들은 취업난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그러다보니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정치를 기획하자고 해도, 청(소)년들은 그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상상력은 삶의 여백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이 어떻게 그 여백을 확보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모든 세대가 머리를 맞대는 것이, 청년팔이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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