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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4. 2017

삶으로서의 공부 #2

스스로 일궈가는 공부

글 순서


1. 겜돌이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2. 스스로 일궈가는 공부

3. 지적 모험의 공간에서

4. 내가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이야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억압적인 규율권력의 작동에 의한 것이든,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노력에 의한 것이든, 공부라는 실천이 품고 있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성철 교수는 식민지 초등교육 팽창을 통해 이런 모순을 분석한 바 있다. 


“일본어 문해라는 칼의 한쪽 날은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이 부정되고 식민지 지배 체제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 칼의 다른 날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무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일본어문해 능력은 비판적 의식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 오성철(2000). 식민지기 초등교육의 형성. 교육과학사.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학생/청소년들의 현재를 저당 잡으려는 소위 ‘어른들’의 꼬드김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학교 교육을 통해 익히게 된 것들이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그러니까 공부가 하고 싶은 일이 되었을 때 큰 자원이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소위 국영수사과로 대표되는 교과 중심의 학교경험은 (비록 입시 위주의 수업방식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회에 발을 내딛기 위한 empowerment의 계기였다. 다만 수험생으로서의 공부가 강요된 노동만이 아니라 나의 ‘힘’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새로운 의미 부여의 계기, 즉 내가 하고 싶은 일로서의 공부를 마주치게 된 경험이 필요했다. 


그 계기는 바로 대학에서 만난 벗들과 공동체였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많은 신입생들이 그러하듯 일단 놀았다. 내 눈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고, 당시 속해있던 과/반 학생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덕분에 3월에는 거의 매일 같이 행사가 있었다. 순전히 사람들이랑 만나고 얘기하는 게 좋아 그런 행사들을 쫓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교양학교’나 ‘오픈 세미나’ 같이 과/반 내부의 학회에서 준비한 공부 모임도 끼어있었다. 잿밥(뒤풀이)에 더 관심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주어진 읽기자료나 발제문을 열심히 읽고 참여했다. 그런데 다루는 내용이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랍시고 했던 것들과는 많이 달랐다. 교육은 물론 철학이나 여성주의, 평화 담론에 이르기까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국영수사과를 공부했을 때와는 달리 ‘나’라는 존재를 담고 있었다. 등록금 인상과 상대평가제 도입 등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의해 위협받는 대학생은 신문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익명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강요된 남성성에 의해 위축될 때도 있고,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여성이나 다른 타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나였다. 이렇게 벗들과의 만남 안에서의 공부는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 그 전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범답안만을 말하며 살았다. 그런 나에게 나의 욕망, 그리고 불편함을 긍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지식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벗들이 던진, ‘나/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세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만남과 실천 안에서 이뤄지는 공부가 텍스트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텍스트 읽기는 거대한 정치적·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진다면 일종의 폐쇄적 과정이 되며, 표상정치 내에서 배타적으로 권력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 헨리 지루 <대학의 다문화주의 내에서 인종정치, 교육, 그리고 표상의 위기>


책 읽기도 글쓰기도 동료들과 함께하는 실천 안에서 공유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며,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 감각 등을 문자로 습득할 수는 없다. 이런 감수성은 실제 함께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며’ 익혀야 한다. 


시민들은 사실적 지식과 논리적 지식, 이 둘만으로는 자신을 주위의 복잡한 세계에 연결시킬 수 없다. 이 두 가지에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시민들에게 요청되는 세 번째 능력은 바로 서사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다른 이의 입장에 있다면 사태가 어떠할지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러한 위치에 처한 이라면 가질지 모르는 감정·소망·욕구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 마사 누스바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처음에 나는 그저 나의 존재가 긍정될 수 있고, 내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 공부의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렇게 시작한 공부 자체가 내 삶의 중요한 일부이자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 되면서 점점 ‘해야 하는 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즉 ‘하고 싶은 일’이 되어갔다. 그리고 해야 하는 공부와 하고 싶은 공부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생겨났다. 학과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다른 분야의 책을 읽거나, 동아리 세미나 준비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특히 졸업 학기에는 해야 하는 공부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또 다시 ‘해야 하는 공부’에 가까운 시험 준비를 시작해서 바로 임용고사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졸업에 지친 나에게 필요한 건 하고 싶은 공부, 내 욕망을 인정해주고, 또 성장시켜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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