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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4. 2017

삶으로서의 공부 #3

지적 모험의 공간에서

글 순서


1. 겜돌이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2. 스스로 일궈가는 공부

3. 지적 모험의 공간에서

4. 내가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이야기



우연찮은 인연의 끈 덕분에 나는 졸업과 동시에 대안학교 인턴 교사가 되었다. 거기는 또 하나의 별천지였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음에도,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과 다른 개인적인 사정들의 떠밀림이 겹치면서 나는 바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문자 그대로 업業이다. 아마도 해야 하는 공부와 하고 싶은 공부 사이의 긴장이 가장 극명한 공간이 바로 대학원일 것이다. 


대학원에서도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학생에게 제시하고, 수많은 공식적·비공식적 방법으로 이를 평가한다. 빚 독촉하는 사채업자처럼 하나를 겨우 보내고 나면 다른 하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 대학원 공부는 많은 부분 ‘해야 하는’ 공부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 수민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공부> 《오늘의 교육 19호》


대안학교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대안학교는 지도교수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가까웠을 뿐, 교육과정에 그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대학원의 교육과정에는 학부 시절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지식과 담론들이 있었다. 


평생교육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회문화적 경험의 교육적 힘이다. 따라서 평생교육은 형식적·비형식적 유형의 계속교육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환경 - 평생교육을 둘러싼 여러 제도와 관계를 포함해서 - 이 적극적으로 깊이 가르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 레이먼드 윌리암스 《Communication》 


성인교육은 무엇이 좋은 음악, 좋은 그림, 좋은 문학인지를 가르는 정해진 기준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대신에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으로 즐기는지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 성인교육의 목적은 지식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범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에두아르드 린드만 《성인교육의 의미》


대학에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만난 것은 바로 나의 존재가, 나의 경험이 긍정되는 순간이었다. 평생교육 전공을 택한 이유는 (사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안에서 하는 공부가 내 경험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평생교육의 신자유주의적 버전, 즉 ‘평생 시험과 공부를 자기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언급했지만, 동시에 학교와 지식 중심 교과의 지배, 사회에서 강요하는 삶의 경로로부터 교육과 배움의 경험을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평생교육’이라는 개념 안에 담겨있다.


평생교육이라는 우산 아래서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은 다양한 경험과 사회적 현상을 포괄한다.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료들만 해도 노숙인들의 생애사, 마을의 형성과정, SNS에서의 여론 형성과정, 사회적 기업 등등 다채로운 주제로 배움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지배적인 교육담론에서 가리고 있던 의미 있는 경험들에 다시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임이나 만화 등의 서브 컬쳐를 비롯해 그동안 ‘공부’라 여기지 못했던 수많은 즐거운 경험들이 배움과 성장에 가지는 의미를 연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만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공부는, 공부의 과정이자 결과인 글쓰기는 사회를 바꾸는 하나의 실천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의 하나로 “정치적 목적”, 즉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제시한 바 있다. 대학에서 경험과 지식의 홍수에 휩쓸리며 다양한 공부를 할 때도 글쓰기는 중요한 실천 중 하나였다. 대자보나 팸플릿에서부터 블로그나 SNS 포스팅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글쓰기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수단이 된다. 사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연구의 과정이자 결과로서의 글쓰기가 다른 어떤 실천보다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에게 평생교육이라는 관점을 통해 교육학의 연구 지평을 확장하고, 가려져 있던 경험에 몫을 돌려주며 그 의미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교육의 모습을 바꾸는 데 꼭 필요한,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는 아직 교육을 정치적인 힘의 역동과의 연관 속에서 사유하는 흐름이 제대로 자리잡혀있지 않다. 한 사람의 배움은, 그리고 그를 둘러싼 ‘교육’이라는 실천은 정치적·사회적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매우 크게 영향을 받는다. 비록 공부보다 게임을 더 좋아했던 나였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는 많은 순간 공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강제성은 하나의 힘이다. 그리고 그렇게 강제된 공부로부터 역설적으로 내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힘 역시 길러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성철 교수가 지적하는 식민교육의 모순이라는 문제의식은 과연 21세기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교육 그 자체가 폭력이고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는 “폭력적인 교육과 비폭력적인 교육을 구분할 게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가깝다면, 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현상과 사람들을 둘러싼 사회적 힘들의 연결망, 작용과 반작용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배움과 성장의 경험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실천과 사회적 흐름을 포착할 수 있는 정교한 관점이 요구된다.


내가 대학원에서 평생교육이라는 우산 아래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은 바로 그 담론의 공간에서, 그렇게 관점을 넓혀가는 일이 나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길러진 관점으로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들의 의미를 찾는 것이 즐겁다. 그 지적 모험의 여정에는 상당히 힘든 노동이 수반되지만 재미난 이야기를 만났을 때의 쾌감은 충분한 보상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있다. 이 글에서도, 그리고 실제 나의 삶에서도 꽤나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지만, 바로 그 희망과 즐거움이 내가 공부를 해왔던,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이유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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