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부터 짬을 내어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읽은 책이 6권이었다(사기는 많이 샀지만 orz). 2015년에는 54권, 2014년에는 106권을 읽었는데 군인이라 가능했던 숫자다. 군대에서 할 수 있는 여가활동이라는 게 별로 없으니.
지난 1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집이 가까워 친하게 지낸 사촌형이 문상 와서 들려준 얘기였다. 이 형이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다닐 때쯤 우리 아버지가 형을 놀려먹으려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사촌형: 훌륭한 사람이 될 거에요
아버지: 훌륭한 사람이 뭔데?
사촌형: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아버지: 돈을 많이 번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
사촌형: ...?
아버지: 훌륭한 사람은 어쩌고 저쩌고...
아버지의 꼰대질이 참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형은 복수를 다짐했고, 형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내가 대략 10살 전후) 수박 먹으러 놀러온 나에게 같은 물음을 던졌다고 한다.
사촌형: 너는 커서 뭐가 될래? (훌륭한 사람 된다고 하면 놀려먹어야지 후후후)
나: 나는 책 읽는 사람이 될거야
형은 당황했다. 뭐지 얘는? 뜬금없이 책 읽는 사람이 된다고 내뱉는 꼬맹이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되나? 아무리 어려도 현실감각이 이렇게 없어서 어떡하나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은 다시 물었다.
사촌형: 책만 읽으면 돈은 누가 벌어?
나: (전혀 고민없이) 돈은 여자가 버는 거야
사촌형: ?!?!?!???
이 대목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사촌형이 나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무렵, 아버지는 늦깍이 대학원생이었고, 돈은 어머니 혼자 벌고 있었다. 10살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서 남자는 책 읽는 사람, 여자는 돈 버는 사람이었던 것. 더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직장생활을 했으니 집에서 출퇴근 했을텐데 나에게 그와 관련된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주말이면 아버지가 나를 자전거 앞 보조의자에 태워 홍지서림이라고 전주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데려가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주된 목적은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찾는 것이었겠지만 나를 서점에 그냥 풀어놓으면 혼자 잘 놀더라는 것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 내가 사달라고 떼쓰던 것 1순위는 레고였고, 2순위는 전집류였다고 한다.
그렇게 "책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뒤,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이런저런 책을, 아마도 평균보다는 많이 읽으며 살아왔으리라 짐작한다. 대학에서는 강의뿐만 아니라 학회, 동아리, 자치언론 등 책을 읽어야만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았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단행본보다는 논문을 많이 읽었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텍스트 입력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 2년 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다. 그렇게 책을 곁에 두던 삶이 작년에 회사를 다니며 뚝 끊겼다. 6권, 그나마 내가 원해서 읽은 책은 3권이었고(추석연휴에 몰아서 2권) 3권은 회사에서 -_- 무슨 자료 만들어내라고 과제로 시켜서 억지로 읽은 책들이었다. 몇 달의 고민 뒤에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냈는데 그 '이렇게'안에는 책 몇 권 읽을 여유조차 없는 빡빡함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어떤 직업을 갖든 지금처럼 한달에 책 2~4권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뭔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 블로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만든 것이다. 이번주에는 무슨 글을 써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20년 전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 주절주절 끄적여봤다. 돈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혼자 버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벌어야겠지만, 적어도 "책 읽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그 다짐만큼은 지켜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