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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

제시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

2008년 5월 25일, 실제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썼던 작문
이제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신촌 오거리의 노란 가로등불과
"자리를 지켜주세요"라고 외치던 목소리는 기억이 생생하다.


제시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전경들의 동작은 신속했다. 착착착착 군화소리를 내며 대열을 갖추더니 방패로 땅을 쿵! 하고 찍었다. 일요일 밤의 신촌 오거리, 주황빛 가로등 조명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도로에서 인도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진압이 시작됐다. 헬멧을 쓰고 울퉁불퉁한 유니폼에 진압용 방패를 들고 있는 전경들이 뭉쳐있던 시위대를 갈라치고 들어왔다. 고성과 욕설, 비명이 난무했고 나는 카메라를 부둥켜안은 채 연세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자리를 지켜주세요. 함께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2008년 5월 25일 일요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본격화한 날이다. 나는 대학 자치언론 후배들과 함께 집회를 취재하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말을 꺼내던 차에, 예고되어 있지 않던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거리행진까지 할 정도로 큰 규모의 집회에 참석한 건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반대 촛불집회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에 워낙 폭력적으로 진압을 당했던 터라 살짝 걱정이 됐지만 오늘 집회의 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대는 청계광장에서 나와 남대문을 거쳐 경찰청까지 “협상무효 고시철회”, “이명박은 물러나라” 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걷고 또 걸었다. 고층빌딩가를 지나 주택과 저층건물이 많은 아현동으로 진입했을 무렵,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늦은 밤, 점점이 하얀 불을 밝힌 주택 창문 밖으로 주민들이 몸을 내밀고 시위대를 향해 “화이팅~!” “이명박 물러가라”라고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도, 초여름 더위에 런닝 차림으로 벽돌집 계단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아저씨도 시위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6.10항쟁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거리에는 최루탄 가스가 없었고, 그래서 시위대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내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노동자 집회, 반전평화 집회, 여성의 날 집회, 그리고 2006년의 평택 집회까지 어떤 주제로 집회를 하든 시위대는 소위 ‘일반시민’에게 불편함의 대상이었다. 신념에 따라 참석한 집회라 해도 많은 사람들의 불만 가득한 눈빛과 짜증 섞인 불평, 혹은 의도적인 외면에 시달리다 보면 ‘미움 받는 존재’라는 서러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상당히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시위대를 향해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나타난 것이다. 후배 한 명은 들뜬 표정으로 역사의 한복판을 운운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쉴 새 없이 그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지금, 그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신촌 오거리에서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웹진에는 아현동 주택가에서 손을 흔드는 시민들의 영상과 신촌오거리의 진압 장면이 동시에 담겨야 했다. 카메라의 남은 용량을 확인했다. “자리를 지켜주세요”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비록 그 자리를 지키진 못했지만 그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은 꼭 담아내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시 신촌 오거리로 몸을 돌렸다.


(1,51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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