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논술 #9

논제: 교양의 예능화, 예능의 교양화

지금도 고민이다. 예능까진 아니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건 PD의 숙명 같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렇지만 재미에 매몰되지 않게. 이놈의 줄타기


논제: 교양의 예능화, 예능의 교양화


몇 년 전 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살인 누명을 썼다며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의 사례를 다뤘다. 50분 방송 중에 45분 정도의 분량은 피의자가 누명을 쓴 것으로 의심할 법한 내용이다. 그런데 방송이 거의 종료된 시점에 CCTV 영상 하나가 등장한다. 피의자가 누명을 쓴 게 아니라 실제 범인이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다. 시청자는 허탈함을 느끼지만 이미 방송은 다 봤다. 즉, 시청률은 이미 '뽑아먹은'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도 시청률이 10%에 육박한다. 교양 프로그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청률이다. 그런데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을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부르기엔 찝찝함이 남는다. 방송법 시행령에는 국민의 교양 향상 및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과 어린이‧청소년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교양 프로그램이라 정의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50분 잘 봤다”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교양 프로그램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존에 교양 프로그램의 특징은 리얼리티, 즉 논픽션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리얼리티라고 하면 예능이 떠오르는 시대다. 관찰 예능의 등장으로 예능에도 다큐멘터리적인 촬영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형식적 요소로는 더 이상 교양과 예능을 구분하기 어렵다. 형식에서의 차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내용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재미가 최우선이다. 올리브 TV의 <어느 날 갑자기 100만원>은 현금 100만원을 연예인 출연자에게 전달하고, 소비과정을 보여줬다. 방영 직후 ‘탕진잼’으로 잠깐 화제가 되긴 했지만 곧바로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 ‘과도한 소비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이어져 금세 종영했다. 


반면에 EBS의 <엄마를 찾지 마>는 독박육아와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일반인 출연자에게 현금 100만원과 하루의 휴가를 선물한다. 100만원과 휴가라는 포맷은 유사해도 평가는 180도 다르다. 시즌2가 방영 중인 지금도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100만원>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다 실패한 것과 달리 <엄마를 찾지 마>는 재미와 의미를 모두 붙잡은 것이다. 이렇게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의 차이는 방송을 본 시청자에게 남는 ‘의미’에 있다.


앞서 예를 들었던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정보값도 주지 못했다. 남은 것은 “50분 잘 봤다”뿐이다. 교양 프로그램의 확장성을 위해 예능적인 형식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재미와 시청률만을 위해 만드는 방송은 교양이라고 보기 어렵다. 교양의 예능화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이렇게 ‘교양의 탈을 쓴 예능’이 국민의 교양 증진을 위해 쓰여야 할 시간을 차지할 때이다. 방송법에서 교양 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을 정해둔 이유는 전파라는 공공재를 통해 국민들에게 유익한 콘텐츠를 제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교양 PD들 앞에는 철저하게 재미로 점철된 콘텐츠들 사이에서 의미와 재미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다.


(1,472자)

매거진의 이전글 언시생 논술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