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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3

제시어: 비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 대목을 가져와서 섞어봤다.
대학 학점으로 풀어보는 건 어땠을까, 라는 코멘트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제시어: 비


“비켜 비켜!” 고성이 들려왔다. 주황색 유니폼에 검은색 조끼와 모자를 쓴 119 구조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결재판을 품에 안고 벽으로 등을 붙였다. 상무님께 결재 받을 서류를 들고 찾아가던 길이었다. 지원부서와 임원실이 있는 12층 사무실, 서른 명 남짓한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표정으로 대회의실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것에 실려 나온 것은 옆 부서 김 과장님이었다. 과장님은 배를 부여잡고 새우마냥 몸을 구부린 채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이 흘렀다. 창밖에 내리는 비가 불안감을 자아냈다. 한숨을 쉬며 마우스를 붙잡는 순간 동기 조 대리에게 문자가 왔다. “급성 위궤양. 병원 올 필요는 없을 듯. 며칠 쉬면 괜찮아지실 거래.” 다행이다. 김 과장님은 신사업 수주 준비로 거의 3주째 집에 안 들어가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쓰러졌을 때는 임원들 앞에서 사업제안서 발표 전략을 보고하던 중이었다. 오늘 새벽에 퇴근하면서 파티션 너머로 인사를 드린 순간이 떠올랐다. 김 과장님은 “안방 침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침대 사진이라도 들고 다녀야겠어”라고 농담을 건네셨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려 탕비실로 향했다. “A+ 받으면 뭐하냐. 위에 구멍이 뚫리는데” 인사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발표된 성과평가 얘기였다. 김 과장님은 전체 사원 300명 중에 15명, 즉 5% 밖에 안 되는 A+등급자였다. 성과평가를 생각하자 우울함이 밀려왔다. 나는 C였다. 우리 부서에서 A를 받은 건 사수인 이 과장님 한 명뿐이었다. 그는 마치 만화 <미생>의 오부장처럼 충혈된 눈으로 살아가는 일벌레였다.


C를 받은 나의 근무시간은 주당 70시간 정도였다. 오전 8시에 출근해 빠르면 밤 10시, 늦으면 새벽 2시 퇴근. 주말에도 자주 출근했다. 그렇게 우리 부서는 저성장을 뚫고 전년 대비 5%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회사 전체 성장률에 미치지 못해 상대평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C를, 나보다 주당 10시간 정도 더 일한 부서원은 B나 B+를, 혈압 때문에 새벽이나 주말근무를 못하는 선배는 D를 받았다. 그의 주당 근무시간도 60시간에 육박했다.


원래 B는 평범함을 상징하는 등급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평범함의 기준이 바뀌었다. 가장 평범하게 일한 선배는 D를 받았다. 그는 야근도 할 만큼 했고, 새 고객도 어느 정도 확보했고, 부서 차원에서 플러스 성장률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 정도로 평범한 직장생활에 주어지는 등급은 B가 아니라 D였다. 그보다 꽤 노력하면 C를,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 B나 B+를 받았다. 그러니까 등급별로 노력의 수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D: 평범한 사람

C: 꽤 노력한 사람

B: 무진장 노력한 사람

B+: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사람

A: 눈이 빨개질 정도로 노력한 사람

A+: 위궤양으로 쓰러질 정도로 노력한 사람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남들 하는 만큼 한다” “평범하게 하는 거지” “더 열심히 해야 A를 받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내려놓고 탕비실 창문을 열었다. 눅눅한 빗내음이 얼굴을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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