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4

제시어: 꽃보다~

원래 '90년대 대중문화 스타가 2017년 대중문화계에 보내는 편지'라는 주제로 썼던 작문이 있었다.
신애라가 <도깨비>의 김고은에게 쓰는 편지를 써봤는데, 평가가 좋아서 픽션 형태로 바꿔봤다. 

    

제시어: 꽃보다~


“페로 프로덕션 2016년 3분기 영업실적 보고입니다.” 북미 지구 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요즘 영 실적이 좋지 않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드라마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대표이사 프린스씨의 표정이 어둡다. 딸깍 딸깍! 볼펜심을 넣었다 뺐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프린스씨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마지막으로 아시아입니다.”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돼있던 차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태양의 후예>가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비로소 딸깍 소리가 멈췄다.


페로 프로덕션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문적으로 기획해 영업하는 회사다. 1697년, 샤를 페로가 구전동화 형태로 전수되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정리해 출판한 뒤 만들어졌으니 300년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집필하는 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영업하고, 수익을 나눠 갖는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비밀이다. 유럽에서 시작했지만 제국주의를 거치며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특히 아시아와 한국은 노다지였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성의 지위가 낮을수록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아시아가 먹여 살리는구먼” 프린스씨가 입을 뗐다. 아시아 지구 팀장이 의기양양하게 일어섰다. “제작비는 이미 회수했습니다. <꽃보다 남자> 이후로 최대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꽃보다 남자>는 1992년부터 12년간 일본에서 연재된 신데렐라 만화다. 대만과 일본, 한국, 중국, 터키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전무후무한 대박을 쳤다. 하지만 너무 판에 박힌 신데렐라 스토리라는 한계도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태양의 후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주인공을 의사로 설정해 수동적인 여성상을 극복하고, 전쟁터라는 새로운 배경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프린스씨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신데렐라 스토리야? 우리 회사랑 안 맞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여주인공은 의사로서, 여성으로서 한국에서의 삶이 무너지고 전쟁터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남주인공이 목숨도 구해주고, 삶의 의미도 찾아줍니다. 여성도 남성도 모두 자극하는 판타지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은 기세를 몰아 발표를 이어갔다.


“<태양의 후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와 다음 작품을 의논 중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요소를 가미하고 사회상도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프린스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회상을 반영한다니? 서구권처럼 성평등 의식이 확산되면 우리 밥줄 끊기는 거 아니야?” 팀장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신데렐라 스토리는 주인공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그런 엔딩을 믿지 않아요. 결혼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 후에 주인공들을 죽일 겁니다.”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팀장은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계속했다. “동양 설화를 활용해 남주인공을 몇 백년간 살아온 요괴로 설정합니다. 엄청난 능력으로 여주인공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지요.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남주인공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여기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뒤, 환생을 거쳐 해피엔딩을 보여주면 됩니다. 이제 한국에서 연애하고 결혼해서 잘 살았다는 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비극 정도는 거쳐줘야죠.” 프린스씨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팀장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먼저, 제목은 <도깨비>입니다.”


(1,800자)

매거진의 이전글 언시생 작문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