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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5

제시어: 사과

김민섭 작가가 연재했던 대리기사 이야기에 김현경 쌤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전개한 '신자유주의 시대 모욕의 형태'에 관한 통찰을 버무려보고 싶었는데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운수 좋은 날>까지 끼얹었으니 너무 복잡했는지도


제시어: 사과


일주일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망원동에 사는 대리기사 김씨에게는 오랜만의 운수 좋은 날이었다. 저녁 일곱 시, 잠깐 일이 있어 합정역에 나온 사이 합정에서 김포로 가는 콜이 떴다. 오늘은 감기몸살로 누워있는 아내와 다섯 살 아이의 저녁밥을 챙겨줄 생각이었지만 왠지 이 콜을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김씨는 콜 승인을 누르고 아내에게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저녁을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차종은 아반떼, 손님은 중학교 부장교사였다. 저녁 일곱 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회식을 마친 모양이었다. 저녁 8시에 벌써 2만 5천원이다. 시작이 좋다. 그런데 손님과 헤어지자마자 김포에서 부천 가는 콜이 뜨는 게 아닌가? 김포에서 부천까지 3만원, 다시 부천에서 일산까지 3만 5천원, 일산에서 광명 KTX역까지 5만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콜을 잡으며 김씨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 돈이면 오랜만에 치킨을 뜯으며 맥주도 마음껏 마시고, 여름감기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삼계탕도 사다줄 수 있었다. 


서울로 가기 위해 광명역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김씨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흥에 겨워 3-3과 3-4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피식댔으니 행인들에게는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때 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집주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김씨. 일은 좀 잘되고 있어?” 

“네, 뭐.. 밤늦게 무슨 일이세요?”

“아니 다름이 아니고.. 내가 정말 미안하게 됐는데 김씨네 전세 연장해야 되잖아.”

“.....”


갑자기 5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얘기였다. 요즘 망리단길이다 뭐다 해서 망원동이 뜬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했다. 집주인은 월세로 80만원씩 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집주인은 정중한 말투로 “미안해요 김씨”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김씨는 기시감을 느꼈다. 1년 전, 같이 사업을 하던 투자자가 자신에게 예고도 없이 투자금을 빼겠다고 말했을 때 그도 김씨에게 “죄송하지만 저도 가족들 생각하면 이쪽이..”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화가 났지만 불법도 아닌 마당에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에게 따져 묻기도 어려웠다. 김씨도 별 수 없이 투자금을 회수해 각광받는 창업 아이템이라던 요식업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전부터 오후까지 편의점에서 일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하는 김씨의 하루였다.


김씨는 혼란스러웠다. 동업자도 집주인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들이 김씨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급작스러운 투자 실패,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흔한 일이다. 누구나 겪을 법한 흔한 일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누구도 직접적으로 김씨를 모욕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도 김씨는 사과를 받아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마치 면전에서 욕을 듣고 뺨을 맞은 것 마냥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있기가 힘들었다. 비틀거리며 플랫폼 벤치로 다가가는 김씨 뒤로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지하철 안내 방송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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