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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6

제시어: 내 인생의 패착

나는 웃기는 톤의 글은 쓰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확인시켜준...ㅋㅋ
보통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쓸 때는 거의 각색을 안하는데 양념을 좀 많이 쳤다. 
내 글 같지가 않고 어색하다.


제시어: 내 인생의 패착


“혈당 기준이 100인데 104입니다. 차수조정으로 6개월 후에 오시면 됩니다.” 군의관의 말을 듣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머리를 어떡하지?’였다. 논개의 고장 진주에 위치한 공군 교육사령부 의무실, 나는 삭발에서 딱 5mm 남긴 빡빡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읍소를 시작했다.


 “저는 이번에 연기하면 임관이 안 되는 나이인데..”

 “어쩔 수 없습니다. 혈당수치가 정상에 가깝긴 하지만 규정상 훈련은 못 받습니다.” 


이보시오 군의관 양반, 이 무슨 논개가 세느강 유람선 타는 소리요. 이 빡빡이 머리로 어찌 사회에 나간단 말입니까.


“저는 꼭 장교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싶습니다.”

“병사도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겁니다.” 


그럼 너도 대위 계급장 떼든가. 군의관은 병사하지 말란 법 있니? 규정이 그렇다니 속절없이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몇 시간 전만해도 얼른 민간인이 되어 집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 3년 걸릴 소원이었는데 훈련소 4일차에 이루어질 줄이야. 신이 내게 베푼 과분한 사랑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훈련소에서 머리를 깎으면 아프니까 미리 깎아야 좋다는 친구들의 조언, 아니 미끼를 덥석 문 것이 패착이었다. 미용실 원장님은 시원하게 밀어달라는 주문에 단골이 군대에 가서 섭섭하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군대에서 쫓겨나 섭섭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머리카락과 뜨거운 안녕을 한 결과, 나에게는 재입대까지 안녕하지 못한 3개월이 주어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입대를 앞두고 내 머리를 밀게 만든 범인, 아니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돈을 써버려 통장 잔고가 바닥이었다. 단기 알바가 가능한 곳을 검색해보니 일이 힘들기로 소문난 P제과점, L패스트푸드점, 몇 개의 편의점이 나왔다. 하지만 나를 만난 사장님들은 모집공고의 ‘용모단정’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군인만큼 용모단정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것인가. 사장님, 편의점도 안보가 중요한 시대인데 딱 봐도 군인처럼 생긴 저를 뽑으시는 게 어떨까요? 헛수고였다.


그 날 이후, 나는 집을 나설 때면 초원의 미어캣이 된 것처럼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빠르게 실내를 찾아 움직였다. 머리 짧은 게 죄도 아니건만 마치 사회의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병사로 재입대해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홍대역 9번 출구, 인파에 묻혀 질식사 직전이던 나를 우연히 지나가던 친구가 구조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나를 알아봤냐는 물음에 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군인은 아무리 사복 입고 서있어도 눈에 띄잖아” 


소름이 돋았다. 대중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는, ‘식별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군인이나 학생의 짧은 머리길이는 단정함의 표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낙인이었던 것이다. 장교 훈련소에서 연기 판정을 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 내가 당장의 생계나 어이없게 장교 임관이 무산됐다는 사실보다 머리 길이를 먼저 걱정했던 것은 그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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