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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7

제시어: 무인도에 가져갈 세 가지

스터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써봤던 작문.
KBS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제 자연다큐 촬영 후기를 참고해서 구성했던 기억이 난다. 


제시어: 무인도에 가져갈 세 가지


카메라를 정리하던 장 PD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뒤를 가리켰다. 돌아서자마자 눈앞으로 짙은 안개가 덮쳐왔다. 해무였다. 어촌 계장이 “안개는 정말 조심하셔야 된다”고 충고했던 기억이 났다. 안개는 순식간에 바다를 뒤덮었다. 1km 떨어진 옆 섬은커녕 2, 3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불안하긴 했다. 몇 차례 무인도 촬영을 해낸 경험을 믿고 촬영을 강행한 게 실수였다. 철새가 머무는 무인도에서 다큐를 찍겠다고 했을 때, 국장은 사람 다치는 일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얏!” 기억을 뚫고 우당탕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장비를 정리하던 선배 촬영 감독이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아프다!” 바다에 빠진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울퉁불퉁한 돌섬인데다 안개 때문에 지근거리조차 보이질 않아 불안했다. 선배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고 나는 장 PD에게 무전기를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신호가 안 잡힙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스마트폰은 먹통이었고 무전기가 옆 섬의 촬영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신호 잡히는 데가 있을 거야.” 장 PD는 무전기를 들고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워보였다. 안개가 더욱 짙어져 그의 형체도 금세 희미해졌다. 


“야! 미쳤어?” 허리를 붙잡고 내 옆에 선 선배가 장 PD 뒤에 대고 외쳤다. “그 자리에 앉아! 기어오라고!” 이 선배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선배의 호통에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오는 장 PD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의 떨리는 눈가를 본 순간 나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급하다고 그만 위험한 일을 시키고 만 것이다. 그는 작년에 결혼한 예비 아빠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궜다. 장 PD가 몰아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묵묵히 우리를 쳐다보던 선배는 내 어깨를 툭하고 건드렸다.


“이 PD, 치킨 좋아하지?” “네?” 뜬금없는 치킨타령에 장 PD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갈매기 구워먹으면 치킨 맛이 날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동네 치킨집들이 갈매기 고기를 판다는 얘기 있잖아.”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갈매기가 아니라 비둘기겠죠.” 자세를 고쳐 앉던 장 PD가 대꾸했다. “괭이갈매기는 천연기념물인데요?” “아무래도 좀 그렇지?” “잡으려다 물귀신 되는 수가 있어요.” 황당한 주제였지만 대화가 이어지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표정 좀 풀렸네, 이 PD.” 갈매기의 조리법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던 선배가 말했다. 나는 선배의 의도를 깨닫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장 PD도 나아진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엘리제를 위하여’ 벨소리가 울렸다. 선배는 이제 생산조차 되지 않을 것처럼 생긴 슬라이드폰을 꺼내들었다. “이게 바로 연평도에서도 터지는 2G 폰이지”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는 그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구세주였다. 촬영 본부에 기상 상황, 보트 출발 시간을 묻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장 PD에게 말했다. “앞으로 무인도 촬영을 할 때는 세 가지를 챙겨야겠어.” 장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전기, 구명조끼, 그리고 2G폰이요?” “아니, 구명조끼는 됐고. 무전기랑 2G폰에 우리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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