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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8

제시어: 잘못된 만남

2016년 CBS 입사전형 2차 필기시험에서 출제됐던 제시어다.
그때도 비슷한 소재로 글을 썼지만 훨씬 장황했고, 흐름도 엉망이었다.
그때 이렇게 썼다면 붙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제시어: 잘못된 만남


오늘 소환장이 날아왔다. 다음 주 수요일, 마포 경찰서로 가야한다. 아직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해남의 고향집으로 소환통지가 갔다면 아마 쓰러지셨을 지도 모른다. 주소지를 자취방으로 옮겨둔 게 다행이다. 2년 전, 아들이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합격했다고 동네 부동산에서 자랑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원래 다음 학기는 휴학하고 군에 입대할 계획이었다. 그 전까지 돈을 모아 부모님 효도여행이라도 시켜드릴 생각이었는데, 이제 효자는커녕 범죄자가 되게 생겼다.


전화벨이 울렸다. 김준표. 이 형과의 인연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부터 시작됐다. “야, 홍무성! 남자끼리 한 잔 더 하자.” 형은 어느 집단에나 있는, 분위기를 주도하는 남자였다. 어차피 해남까지 가는 버스는 끊긴 시간이었다. 나를 포함해 동기 남자들 세 명과 준표형을 중심으로 한 남자 선배 다섯 명, 총 8명이 새벽 첫 차가 다니는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선배들의 카톡방에 초대받았다. 카톡방 이름은 ‘남자끼리’였다. 이 카톡방만 아니었다면 나는 준표형과의 인연을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를 받았다. “씨발 재수 없게 걸렸네. 설마 너냐?”로 시작된 통화는 금방 끝이 났다. 우리의 카톡방 내용이 대자보로 붙은 것이다. 준표형은 누군가 여자 친구한테 걸린 것 같다고 추측했다. 아마 기소되진 않을 거라고, 다들 휴학하고 군대 갔다 오면 잠잠해질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동안 형의 말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형은 우리 과 남자들의 중심이었다. 게임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고민상담도 잘 해주는 선배다운 선배였다. 나는 준표형과 친해지고 싶었다. 아니, 나도 준표형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카톡방의 멤버라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음담패설이었다. 준표형과 선배들은 카톡방에서 “15학번은 OO이랑 XX가 A급이지. 16은 @@ 정도?” 같은 외모평가부터 누가 밤에 어떨지 궁금하다느니, 어디를 만지고 싶다느니 하는 말을 해댔다.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야한 얘기를 늘어놓는 동기에게 “역시 남자”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대화가 오갈 때면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홍무성이는 누구 좋아하는데?”라는 물음에 고개를 젓자 다른 선배가 “이 새끼 게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웃어넘겼지만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겉돌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나를 빼고 모임이 벌어지는 일도 생겼다.


난 이 남자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강의실에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 선배가 눈에 띄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선배의 다리 사진을 찍어서 카톡방에 올렸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 세 번, 열 번은 쉬웠다. 내가 사진을 올리면 다른 남자들의 품평회가 벌어졌다. 준표형은 그때마다 ‘예술성 만점’이라며 나를 칭찬했다. 나도 드디어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인정받은 결과가 오늘 날아온 소환장이었다. 우리의 잘못된 만남은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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