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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9

제시어: 쓰다

원래 '서울역'이라는 제시어로 썼던 작문을 '쓰다'라는 제시어에 맞추어서 살짝 바꿨다.
직접 현장에 나가서 보고 쓴 글이다 보니 디테일이 괜찮다는 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제시어: 쓰다


실패다. 튀겨놓은 연근이 생각보다 너무 쓰다. 백종원 연근조림 레시피라는 글을 보고 따라 만든 건데 뭐가 문제였을까?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 스크롤을 올렸다. 이런, 튀기기 전에 그냥 물에 담가놓는 게 아니라 식초를 넣고 데쳤어야 한다. 이렇게 생활의 지혜 하나를 익혔다. 요즘 가뜩이나 인생의 쓴 맛을 잔뜩 보고 있던 참이다. 홀로 자취방에 틀어박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입사지원서를 제출하고, 가끔 면접을 보고, 탈락 통보를 받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 와중에 연근까지 나에게 쓴 맛을 안겨주다니 여러 모로 씁쓸한 하루다.


오늘 연근을 사온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늦은 오후 시간의 대형마트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붉은 색 쇼핑카트와 녹색 장바구니에 부딪히지 않으려면 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마치 사람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미로에 서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산만한 인파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가슴 높이께 오는 시식대 뒤에 서서 “저렴한 가격, 연근 100그램에 550원”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채소 매대의 판매원이었다. 염색을 했는지 검은 색 머리칼 사이로 흰 머리가 가끔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규칙적이었다. 기름이 자글자글 끓고 있는 조그마한 튀김기에 가위로 연근 조각을 잘라 넣고, 적당히 익은 연근 튀김을 시식대 위로 올리고, 주기적으로 “어서오세요. 연근 한 번 맛보세요.”를 외쳤다. 붉은 색 쇼핑 카트나 녹색 장바구니가 그녀 앞에 멈출 때면, “튀김 한 번 맛보세요, 고객님”이라 말하며 녹색 이쑤시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쓰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값싼 채소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판매원들 중에서도 유난히 외로워보였다. 맞은편의 과자 코너는 카트를 밀고 있는 쇼핑객들로 가득했다. 날카롭게 외치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걸 보니 해외에서 한국의 과자가 인기 있는 모양이었다. 채소 코너 옆의 반찬 코너에서는 판매원 세 명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쇼핑객이 없을 때면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누가 재밌는 말이라도 꺼냈는지 동시에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연근을 튀기고 있는 그녀는 찾아주는 손님도, 함께 일할 동료도 없이 홀로 서있었다.


특별 세일을 알리는 생선 코너의 마이크 음성과, 온갖 나라의 언어로 펼쳐지는 쇼핑객들의 대화와, 마트 차원의 행사를 공지하는 방송 소리가 가득 메운 공간을 향해 그녀는 조그맣게 외치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 연근 100그램에 550원. 맛있는 연근 담아가세요.” 아니, 온통 무언가를 사가라며 혹은 사겠다며 고함치는 소리들 사이에서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홀로 서서 연근이 싸고 맛있다고 홍보하는 그녀의 모습이 여기저기 자기소개서를 뿌려대는 나의 일상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400g이 조금 넘는 연근 한 뿌리는 2,350원이었다. “껍질 벗기고 썰어서 튀겨 드시면 맛있어요. 조림으로 밑반찬 만드셔도 좋구요.”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실린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 가장 못생긴 연근 한 뿌리를 골라 장바구니에 챙겨 넣었다.


(1,55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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