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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0

제시어: 환생

내용은 KBS의 10분짜리 휴먼다큐 한 에피소드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환생이라는 제시어를 치매로 연결시킨다는 발상 하나 믿고 밀어붙였는데 평은 나쁘지 않았다.


제시어: 환생


“내 나이가 몇이가?” 안방에 누워 TV를 보던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인디요?”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친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재차 묻는다. “당신 나이는?” 그녀는 우리 양반이 또 시작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나이는 일흔 두 살, 그의 나이는 일흔 아홉 살이다. “이렇게 가끔 애기가 돼야서” 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그녀의 웃음기 머금은 표정을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우개가 있다. 이따금씩 지우개가 움직이면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나도 못 알아보고, 아들딸도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그게 하나 걱정인디..” 밝은 톤을 유지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흐려졌다. 그가 치매 판정을 받은 것은 6년 전이었다. 5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의 시간은 그때부터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간은 앞으로 향했지만, 그의 시간은 어제로, 손녀의 결혼식으로, 때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는 0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히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 마냥 낯선 존재가 되었다가도 그녀가 “내 이름이 뭐요?”라고 물으면 곧잘 그녀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이게 누구요?” “...미영이” “그 옆의 야는?” 점심을 먹고 난 뒤, 노부부의 문답이 이어졌다. 그녀는 하루 세 번 안방에서 그와 마주앉는다. 두 사람 앞에는 꽤 오래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대가족의 사진이 놓여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녀의 나이 스물에 둘은 부부가 됐다. 함께 청소일을 하다가 가까워진 사이였다. 바쁘고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아이도 내리 다섯이나 낳았다. 그녀는 “직장 일 나갔다가, 아아들 밥해주고, 또 직장 일 나가고 그렇게 살았지”라며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인터뷰를 하던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안방에 누워있던 그는 그녀가 나갈 채비를 하자 몸을 일으켰다. “집 잘 보고 계세요. 맛있는 거 사올게요.” 그녀는 평소 말투와 다르게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발랄한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 역시 웃으면서 “잘 다녀오세요”하고 맞장구를 쳤다. 노후를 알콩달콩 함께 보내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시장에 다녀올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떤 노래 즐겨 들으시냐는 질문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라며 직접 노래 한 소절을 불렀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냐는 질문엔 그녀의 요리 실력을 자랑하기 바빴다.


“임자 어디 갔지?”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지우개가 움직인 모양이었다. 잠시 당황했다가 입을 떼려는 순간, 그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쪽지를 읽고 있었다. “시장 다녀올게요. 그리 아시고 집 잘보고 계세요.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요.”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쪽지를 훑던 시선이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미소를 유지한 채 나를 바라보며 “시장 갔다네”라고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에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식탁 위에 남겨진 쪽지에 눈이 갔다. 쪽지에는 그가 읽지 않은 한 문장이 더 쓰여 있었다. “...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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