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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5

제시어: 기적

가상의 공간이나 조직을 만들어서 써내려간 작문이 몇 번 괜찮은 평을 받았었는데 이건 망..
특히 사회적 참사라는 소재는 어지간한 고민이 선행되지 않으면 짧은 픽션으로 다룰 수 없는, 다루면 안되는 것 같다.


제시어: 기적


빨간 불이 들어왔다. A급 대형재난 경고등이다. 재빠르게 위치를 확인했다. 아시아, 한국, 전라남도, 진도, 동거차도. 상황판의 지도가 점차 클로즈업 되며 사고 장소를 비추었다. “사고 인원은?” 부스스한 표정에 까치 머리를 한 본부장이 상황실로 들어오며 내뱉었다. 사무실에서 잔 모양이었다. “총 476명입니다.” 인원 배치를 담당하는 사자가 답했다. “예상되는 사망자 수는?” 본부장이 사무적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게.. 여기가 한국입니다.” 본부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국은 대형재난 데이터가 별로 없는 나라였다. “기적 예보관 불러와”


여기는 저승에 위치한 대형재난 상황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명이 정해져있지만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다르다. 대형재난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기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기도 하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이 난리통에 죽기도 한다. 저승사자 한 명이 한 번에 인도할 수 있는 영혼은 12명. 그래서 대형재난이 터지면 사자를 얼마나 파견할지 정하기 위해 상황실이 급박해진다. 저승사자들의 숫자가 빠듯해서 사고가 났다고 무작정 많이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적 예보관이 헐레벌떡 상황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주섬주섬 자료를 정리하더니 브리핑을 시작했다.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서..” 기적 예보관은 재난이 발생한 나라를 분석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예측하는 일을 담당한다. “문화선진국으로도 분류되고, 민주주의 선거와 전문 행정 시스템도 어느 정도 확립된 곳으로..” 본부장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는 빠른 결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는 거야?” 그가 책상을 치며 물었다.


기적 예보관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 상주하는 사자에게 확인한 결과, 대부분의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고, 주변에 어선들도 몰려들고 있으며, 군당국에서 구조 움직임이 관측된다고 합니다. 최소 70%, 많으면 80%는 구조될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기적은 요행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직업윤리, 그리고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2009년 미국에서 이륙하자마자 엔진고장이 발견된 비행기 사고가 벌어졌을 때, 우리는 전원 사망을 예상하고 저승사자 10명을 급파했다. 하지만 노련한 조종사의 판단과 9.11 테러 이후 구축된 항공재난 대응 시스템 덕분에 탑승객은 한 명도 사망하지 않는 기적이 발생했다. 당시 조종사가 남긴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은 상당히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선장은 선원 경력 40년, 선장 경력 30년이 넘은 사람으로 파악됩니다. 상주 저승사자도 있으니 5명 정도만 파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적 예보관이 브리핑을 마쳤고 인원 배치를 담당하는 사자가 본부장에게 결재판을 내밀었다. 본부장은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가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의 습관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잘 돌아간다 이거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결재판에 싸인을 마친 그는 투덜대며 일어났다. “인간 세상에선 지금 당연한 일을 하면 기적이 된다는 거잖아. 그러니 뭘 믿고 쉴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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