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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6

제시어: 혼

EBS 다큐프라임 <먼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이 고독사였다.
그 내용에 지금 혼밥 트렌드에 대한 분석이 지나치게 상업화된 측면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더해봤는데
짧게 우겨넣으려다보니 메시지가 얕아졌다.


제시어: 혼


여자가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능숙하게 칼질을 하고 적당히 벽지가 잡히면 손으로 찢어내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양동이를 손에 든 조수가 들어와 물었다. “며칠이나 지나서 발견된 거래요?”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일주일만이라고, 내가 대신 대답해주고 싶었다. 조수는 여자의 침묵이 무안하지도 않은지 질문을 이어갔다. “어쩌다 혼자 죽었을까..?” 나는 그가 혼자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가 숨을 거둔 날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해가 질 무렵, 검은색 편의점 비닐봉투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그가 방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나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노가다 작업복을 벗어던지는 동안 나는 오늘 하루의 뉴스를 들려주거나, 아이돌 가수의 무대를 보여주곤 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건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도 그는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에 참치캔을 안주 삼아 저녁을 먹으며 <나 혼자 산다>를 봤다. 말이 ‘혼자 산다’지, 실제로 내가 그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혼자 사는 연예인들이 같이 모여서 놀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는 대개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유난히 부러움 섞인 눈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를 쳐다보며 “좋겠다..”고 한숨 쉬듯이 말했다. 그때 나는 뉴스를 보여주던 중이었다. 기자는 밝은 톤으로 “혼밥, 혼술, 혼행, 혼영 등 혼자서 즐기는 일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앵커는 기자의 멘트를 이어받아 ‘1코노미’가 부상하고 있다며 청년세대의 문화적 욕구를 운운하는 해설을 덧붙였다. 그의 부러움 섞인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칫”하는 소리와 함께 채널이 넘어갔다. 나는 속으로 ‘지금 31번을 틀면 액션 영화를 볼 수 있어’라고 외쳤지만 그는 이내 나를 꺼버리고 말았다.


“발견자는 누구에요?” 쉬지 않고 지껄이는 조수의 질문에 여자가 벽지를 털어내다 말고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누구겠어. 수도세 받으러 온 집주인이지.” 여자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조수는 촐싹대는 말투로 덧붙였다. “아이고.. 죽을 때 혼자면 얼마나 쓸쓸할까.”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봤다. 특별히 쓸쓸할 것 없는 날이었다. 그도 내 앞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가끔 영화도 보았지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혼술, 혼밥, 혼영과 그의 삶은 많이 달랐다. 쓸쓸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의 삶이었다. 그날도 그는 언제나처럼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단지 다음날 아침 햇살에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일어나지 못한 것뿐이다.


# “인간의 마지막을 누가 지켜주는가? TV가 제일 많다.” - EBS 다큐프라임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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