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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7

제시어: 벽

혼자만의 공간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 주거형태를 셰어하우스랍시고 포장해 새로운 트렌드인 것마냥 선전하던 업체에 대한 비판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마침 뒤늦게 <청춘시대>를 정주행한 터라 이런저런 내용을 버무려서 써봤다. 


제시어: 벽


A가 집을 나간 지 일주일째다. 꼼꼼하게 나를 닦아주던 A의 손길이 사라진지 일주일째기도 하다. 나는 벽이다. 쥐도 새도 없는 도시 한복판의 단독주택에서 낮말과 밤말을 모두 듣는 건 나뿐이다. A가 사라진 것은 열흘 전 부엌에서의 술자리가 발단이었다. B가 A에게 말했다. “집에 들어온 지 벌써 3주짼데 우리 너무 안 친하지 않니? 처음엔 다 그렇긴 하지만 뭔가 두꺼운 마음의 벽이 느껴진다구. 혹시 우리가 싫은 건 아니지?” A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닌데.. 미안..”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너무 들이댔나? 친해지고 싶단 뜻이었어. 짠~ 미안해” B는 맥주캔을 내밀어 부딪히더니 화제를 바꾸어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꺄아악!” 술자리가 끝나고 각자 방으로 흩어진 시간, B의 비명이 집안을 뒤흔들었다. 둘, 셋씩 같은 방을 쓰는 하우스메이트들이 뛰쳐나왔다. B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불 꺼진 화장실에서 A가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미쳤어? 왜 화장실에 불꺼놓고 앉아있는 거야, 사람 놀라게!!” “미..미안” A는 B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할 수만 있다면 A를 변호해주고 싶었다. A는 원래 다른 사람들이 잠든 시간이면 항상 화장실에서 불을 끄고 잠시 앉아있다 가곤 했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멍하니 나를 바라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는 게 전부였다.


“혼자서 있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사람들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고, A는 C와 식탁 앞에 마주앉아 말했다. C는 가장 나이가 많고 이 집에 오래 살아 ‘왕언니’라고 불렸다. C가 이야기를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A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었어요. 고등학교는 기숙사가 있는 곳이었는데 밤이면 혼자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앉아있었어요. 벽에 둘러싸여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야 다른 사람들 눈에서 자유롭게 있을 수 있으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내성적이어서 앞으로 사회생활 어떻게 할 거냐고 일부러 쉐어하우스 오긴 했는데.. 나가야 할까 봐요” C가 잠시 설득했지만 A는 마음을 굳힌 듯 했다.


A가 떠나가고 일주일, 다시 맥주 파티가 열렸다. 오늘도 B가 말이 제일 많았다. “앞으로 하메 받을 때는 MBTI라도 해야될까봐. 너무 내성적인 사람은 좀.. 걔도 성격 안 고치면 취업하기 힘들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B에게 꽂혔다. “아니 그렇잖아. 요즘은 활달하고, 말 잘하고, 자기표현도 적극적이고, 그래야 면접에서 뽑히지.” B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나처럼?” 사람들은 B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던지며 까르르 웃어댔다. 어이없다는 듯이 미소 짓던 C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C의 얼굴이 문득 쓸쓸해졌다. “내성적이어도 A처럼 맡은 일 열심히 잘하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던 친구면 좋지 뭐. 나간 지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 화장실 벽에 벌써 물때랑 곰팡이가 있네? A 대신 누가 청소하기로 했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B에게 날아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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