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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세상의 바보들에게


인간을 나눈다면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형 인간

다른 하나는 원숭이형 인간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인간형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원숭이형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지만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그는 현실의 이익을 추구한다.


원숭이형 인간이라 명명한 것은 사람과 원숭이의 실험 때문이다.


두 가지 실험을 보자.


첫번째는 과도한 모방에 관한 실험이다.

철창에 갇힌 원숭이가 있다.

그 원숭이에게 피실험자가 플라스틱 통을 가져 간다.

피실험자는 플라스틱 통을 가지고 마치 원시부족의 의식처럼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통의 윗부분을 두 번을 긁고 세번을 두드린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를 가운데 있는 구멍에 집어 넣어 안에 들어 있던 사탕을 꺼낸다.

피실험자는 막대기를 원숭이에게 주고 원숭이는 사탕을 얻기 위해 피실험자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이 세상 동물중에 사람만이 유일하게 모방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실험으로 그 이론은 깨졌다.

원숭이는 똑같이 따라 했고 사탕을 얻었다.


이 실험을 인간에게 실험했다.

이 실험의 객관성을 위해 학습을 하지 않은 4살 이하의 어린 아이에게 했다.

물론 인간이 이 아이도 피실험자의 실험과 동일한 행동을 했고 사탕을 얻었다.


다음 단계다.

이번에는 다른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플라스틱 통은 투명했다.

그래서 구멍에 나무 막대기를 집어 넣어 빼내지 않아도 사탕이 보이도록 설계 되었다.

피실험자는 위와 같은 통의 윗부분을 두 번 긁고 세번을 두드리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를 통속으로 집어 넣어 사탕을 빼냈다.

그리고 플라스틱 통을 원숭이에게 줬다.

원숭이는 피실험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원숭이는 나무 막대기를 버리고 손가락을 집어 넣어 사탕을 빼냈다.

원숭이는 놀라울정도로 합리적이다.


다음으로 똑같은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인간의 어린아이에게 줬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똑같은 통을 긁는 행위와 두드리는 행위를 하고 피실험자는 아이에게 막대기를 건네줬다.

그러자 그 아이는 피실험자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나무 막대기를 집어 넣어 사탕을 빼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반대의 경우다.

인간은 탐욕적이고 원숭이는 비합리적일 것이라는 기본 상식 말이다.


두 번째 실험이다.

이 실험의 목적은 원숭이가 협력을 하는가? 이다.

협력은 사람만이 하고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지구를 지배한 아주 구체적인 인간의 장점이다.

즉 집단적인 협력으로 사람이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없이도 하늘을 나는 강력한 날개 없이도 거대한 몸집이 없어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증거다.


우선 원숭이다.

철창에 갇힌 원숭이 두 마리에게 끈 하나씩을 줬다.

끈 두개에 매달린 기다란 나무 통 위에는 끈을 당기면 나무가 가까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당기면 나무는 가까이 오지 않으며 그 위에 놓여져 있는 사탕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원숭이 둘이 동시에 끈을 당겨야 하며 너무 세게 당기지 않도록 협력하여야 한다.

원숭이는 사탕을 얻기 위해 끈을 당긴다.

처음에는 한쪽이 세게 당기거나 당기지 않아 사탕이 떨어진다.

그래서 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의 머리를 때린다.

그래서 협력을 유도한다.

마치 인간과 같다.

그리고 살살 잘 잡아다녀 통을 자신의 앞쪽까지 유도한다.

놀라운 일이다.

원숭이도 협력을 한다.

그런데 나무통이 다가 왔을 때 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의 사탕에 손을 댄다.

그리고 사탕 3개 중 한개를 슬쩍 집어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

협력은 하지만 단기적인 협력일뿐이고 결국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데 급급하다.


다음은 사람이다.

물론 위에 실험했던 동일한 4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에게 앞에 통이 놓여져 있다.

통에는 동시에 잡아 당겨야 뽑히는 줄이 있다.

그 줄을 동시에 잡아 당기면 자신의 앞으로 사탕이 떨어진다.

한쪽만 줄을 잡아 당기면 사탕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협동을 중시하는 실험이다.

그런데 원래는 두 개, 두 개씩 공평하게 사탕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는 줄을 잡아 당기면 한쪽은 3개가 나오고 다른 한쪽은 한 개가 나오도록 설계를 바꾸어 놓았다.

어린 아이는 줄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사탕이 자신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결과를 둘 다 동시에 확인했다.

한 개의 사탕이 떨어진 쪽의 아이는 허탈한 미소로 근처에 있는 피실험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세 개의 사탕이 떨어진 아이는 한 개의 사탕이 떨어진 아이에 번지는 아릿하게 보이는 분노의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세 개가 떨어지고 반대편 아이에게는 한 개가 떨어진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실험 전에 원숭이에게 한 실험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원숭이에게 똑같은 일을 하면 보상을 줬는데 한 원숭이에게는 맛 없는 오이를 보상으로 줬고 다른 원숭이에게는 달콤한 포도를 줬다.

물론 그 실험 전에는 오이를 동시에 줬었다.

그러나 보상을 달리 했다.

맛 있는 것과 맛 없는 것 말이다.

맛 없는 오이를 받은 원숭이는 분노했다.

그리고 피실험자에게 항의의 소리를 질러댔고 자신의 머리를 철창에 부딪치며 항의 표시를 강하게 했다.

그러나 포도를 받은 다른 원숭이는 분노하는 원숭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포도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사람은 달랐다.

세 개의 사탕을 받은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한 개의 사탕을 주었다.

인간의 아이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동감 능력이 있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인간형과 원숭이 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모두 인간형이 아니고 원숭이 형이 있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린 아이가 있다.

한 아이에게 숙제를 내줬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말햇다.

숙제 할께라고 말이다.

그러나 엄마 앞에서는 숙제를 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학숙제를 풀 정도의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에 엄마에게 수학책을 건네면서 다 했다고 했다.

엄마는 답을 맞춰보고 처음에는 기특해 했다.

답이 다 맞았다.

그러나 곧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학을 푼다면 옆에 수학문제를 푼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답만 오롯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아이는 합리적인 원숭이 형이다.


다른 아이가 있다.

수학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빈 페이지가 발견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발견하지 못했다.

수학 페이지를 넘기다 다시 앞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한다.

여기 수학 페이지 안 풀었다고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자신은 그 페이지도 풀고 오늘 할 숙제도 해야 하는데 그 아이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두 아이 중 발전은 누가 더 있을까?


사람의 발전을 놓고 보자.


한 남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한다.

좋아하는 것만 한다.

TV를 보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한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불러내 술을 마신다.

맞벌이를 하지만 집안 일은 아내 몫이다.

아이들의 교육도 물론 아내 몫이다.

집안에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원숭이 형이다.


다른 남자가 있다.

평소에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임, TV 시청, 오락 등은 하지 않는다.

대신 책을 읽는다.

신문을 읽는다.

쓸데없는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다.

맞벌이를 하기에 집안일을 같이 한다.

아이들의 교육도 아내와 분담해서 한다.

평소에 자극적이고 일생에 도움 안 되는 것을 안 하고 매일 배우니 아이들과 할 얘기가 많다.

아이들의 교과서는 암호로 가득하다.

그것을 설명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진기의 설명서와 같다.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암호 말이다.

조리개를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셔터스피드를 높이는 방법을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 암호로 가득한 것이 아이들의 교과서다.

그러니 교과서를 해석해줘야 할 어른은 학교 선생님도 집에 있는 부모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설명해 준다는 것은 단지 학업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닌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밀접해 진다는 것과도 같다.

집안에 싸움은 있지만 줄어든다.

인간 형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원숭이 형과 인간형을 많이 본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원숭이 형은 인간형들의 미움을 산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원숭이 형은 따돌림을 받는다.

그렇다고 인간형만이 성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공은 결과다.

결과에만 집착하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남을 밟고 일어선 원숭이형의 인간만이 성공하는 더러운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인간의 목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형의 삶을 추구해야 남들의 공감도 얻어내고 살아가는 재미도 느낀다.

진정한 성공은 원숭이의 성공이 아니라 인간의 성공이다.


인간은 세상의 바보지만 남들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고 남의 아픔을 공감하는 진정한 현자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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