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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의 동물이다.

공부 말고 다른 것으로도 인정해보자.

인간은 인정의 동물이다.

인정받기 위해 살고 인정받으며 산다.
그래서 인정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노예와 주인의 비유가 있다.
주인은 노예의 생각을 모른다.
즉 '존경하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서 항상 주인님을 받들고 살고 싶습니다.'라는 노예가 있다고 치자.
그럼 이 노예가 나를 존경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로만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검증하고 싶은 주인이 있다고 치자.
그럼 어떻게 하면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바로 자유를 주면 된다. 그
자유를 주는 순간 노예가 저는 그래도 주인님 곁에 있겠어요. 한다면 그것은 마음까지 지배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떠나버리면 그것은 몸만 지배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회할 수 있다.
몸이라도 지배할 걸.
사랑을 놓고 보자.
사랑은 노예와 주인과 다르다.
사랑이 노예와 주인의 예와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사랑이란 전제에 자유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나도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려는 것이다.
만약 사랑해라고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 얘 뭐야?' 하고 가버린다면 어떨까?
인정받지 못한 절망감이 클 것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인정을 해주는 것은 하나다.
공부다.
특히나 고등학교 정도 올라가면 인정해주는 분야는 더욱 공부로 좁혀진다.
운동을 잘하거나 성격이 좋거나 하는 것은 모두 뒷전으로 밀린다.
그럼 한 반에 30명 정도가 있다고 치자.
여기서 몇 명이나 인정을 받을까?
한 두 명 정도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인정받지 못하니 좌절감이 클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때리면 어떨까?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런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떠나기라도 하겠지만 학교를 떠나면 자퇴가 된다.
그런데 이 학교에 공부 말고 오케스트라라는 것으로 학생들을 인정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강당에서의 연주는 문제아들을 인정해주는 계기였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따뜻한 박수가 터져나온 것이다.
한 번도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 가슴에는 무언가 울컥하는 따뜻한 무언가가 올라왔을 것이다.
우리의 자녀도 공부 말고 다른 것으로 인정해보자.

그러나 사실 학교에서는 공부 말고는 다른 것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도 알려주자.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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