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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英여왕이 눈물로 떠나보낸 브리타니아호

[현미경] 英여왕이 눈물로 떠나보낸 브리타니아호



1997년 전용 요트 퇴역시키기전 "새 요트 사달라" 정부에 요청했다 퇴짜맞은 사실 24년만에 드러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정부를 상대로 새 전용 요트를 사 달라는 '로비'를 한 사실이 20여년 만에 알려졌다. 당시 로비는 실패했다.

버킹엄궁의 고위 간부가 국무조정실 관료에게 "정부가 새로운 '로열(Royal) 요트'를 마련해주면 여왕은 무척 반길 겁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이 외부에 새어나가면 곤란합니다"라고 쓴 메모가 최근 국립 문서저장고에서 발견됐다고 일간 더 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메모는  1995년 5월 영국 총리가 여왕의 전용 요트였던 '브리타니아〈사진〉'를 퇴역(退役)시키겠다고 밝힌 직후였다. 전용 요트가 없어지게 될 상황에 처한 여왕이 새 요트를 원했다는 것이다.

전용 요트에 대한 여왕의 사랑은 컸다. 브리타니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954년 진수됐다. 길이 126m에  250명(승무원 25명 포함)을 태우고 당시로는 상당히 빠른 시속 40㎞로 달릴 수 있었다. 44년에 걸쳐 135국의 600개  항구를 방문했다. 항해 거리를 합치면 201만㎞에 달했다.

여왕은 브리타니아를 아꼈다. 연회장과 거실은 여왕의 취향을 반영해 꾸몄다. 배가 정박한 곳에서 여왕이 타고 다닐 롤스로이스 승용차도 배에 싣고 다녔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 초대받아 식사를 했다.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이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여왕은 "내가 정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이 배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7년 브리타니아 퇴역식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눈물을 흘렸다. 퇴역한 브리타니아는 영국 북부 에든버러에 전시돼 대중에 공개돼 있다. 배 안의 시계는 3시 1분에 맞춰져 있는데, 퇴역식을 한 날 여왕이 이 배를 떠난 시각이 오후 3시 1분이었다.

영국  정부는 브리타니아 퇴역 이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새로운 왕실의 호화 선박을 제작하는 것은 여론의 비판이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브리타니아호가 퇴역하기 직전 미국 가수 고(故) 마이클 잭슨이 배를 사들이겠다고 제안했지만 영국 왕실은 정중히  거절했다. 2017년 보수당 의원 50명이 '로열 요트' 제작을 위한 특별 복권을 발행해 1억2000만파운드(약 1700억원)를  마련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영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홍보 대사'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반대가 많아 논의로만 그쳤다.




 /영국 국립선박박물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8/2019010800242.html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일어났을까?


유럽에 서쪽 끝에 있는 섬나라에서 말이다.


원래 과학이나 역사나 인구로 봤을 때 중국이나 오스만투르크에서 일어났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왜 영국일까?




이유는 마그나 카르타에 있다.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마그나 카르타가 우리나라 헌법에도 들어가 있는 자유에 대한 자세한 기술에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Autocratic)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Authority)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Scutage)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 금과옥조(Golden section)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전쟁을 일삼는 왕에게 국민(귀족)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예측가능한 범위는 국민의 허락이 있어야 세금을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신체의 자유를 규정했다.




그로인해 국왕의 권한은 크게 축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대륙의 프랑스는 절대왕정이 들어오고 개인의 자유를 크게 구속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은 소유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죽일수도(신체의 자유) 땅을 빼앗을 수도(소유권 침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만약 황무지를 개간 했는데 갑자기 왕이 내 놓으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다.




왕의 권한이 축소하자 자유 민주주의, 자유 시장경제가 꽃을 피웠고 이로 인해 과학 기술이 만개했다.


과학기술도 특허권에 의해 보호 받으니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그로인해 자본을 대는 자본가와 발명을 하는 과학자의 협업도 가능했다.


그로인해 멀리 원양항해를 통해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고 이 또한 국가의 부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자유를 구속했던 영국 이외의 나라들은 영국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홍콩이나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이기를 바랬다.


오히려 자신은 영국의 국민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홍콩이 다시 중국에 반환 되었을 때 홍콩배우들과 부자들은 캐나다,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다.




영국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있어도 중국놈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없다.




물론 이런 왕의 권한이 축소된 것은 현재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나 영국여왕이 새 요트를 사 달라 얘기했다 퇴짜를 맞은 것은 영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영국에 모두 빚을 지고 있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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