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발전하는가?
누구나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스럽지만 인생이 즐거워진다.
자아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의미가 아닐까?
만약 왜 사는지에 대한 의미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루를 목표없이 일어나서 먹고 입고 일하고 자고를 반복한다 죽는다고 치자.
그럼 그의 인생은 무엇인가?
그의 인생은 극단적으로 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닐까?
똥을 만들어내는 나는 누구인가?
똥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닐까?
내가 똥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니라면 나는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미를 내가 규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아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다람쥐 챗바퀴 돌듯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면 그의 인생은 비참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자아정체성이다.
산업혁명 시대 이전에 개인은 어디에서 자아정체성을 찾았을까?
존 로크가 주장하는 것은 노동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찾는다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아이에게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히기 위해 열심히 뜨게질을 해서 털모자를 짰다.
그렇다면 자아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은 분업에 들어가면서 노동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상실했다는 것이 철학자들의 견해다.
분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자신이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성 상실과 인간의 소외가 일어나고 하나의 거대한 공장의 부품으로서의 개인만 존재한다.
그래서 자아정체성을 찾기 힘들다.
그런면에서 예술가들은 전분야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함으로서 자아정체성을 찾기 때문에 자부심이 높다.
전문직도 마찬가지다.
변호사건 의사건간에 자아정체성을 찾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기업에서 부품으로서의 존재로 밖에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아정체성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대기업을 떠났을 때 그곳에서 했던 일이 현실사회에서 막바로 쓸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자아정체성을 찾기 힘들고 은퇴 후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도 그렇다.
자아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더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청년기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에 버틸 수 있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청년이 있다고 치자.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산다.
한달을 벌어 한달을 먹고 산다.
마이너스 통장도 쓰고 사채도 끌어다 쓴다.
그러다 중년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중년쯤 오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허탈감에 빠진다.
지금까지 십년 이상을 청년기와 똑같은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살고 잇다.
그리고 지옥같이 살아가는 이 삶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나중에 나이 들어 노동 능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병이 들어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참을 수 잇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에 절망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자살율이 높다.
그래서 자아정체성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자아정체성을 찾을까?
현대사회에서는 자아정체성을 소비로서 찾는다.
그렇다면 어떤 소비를 통해서 찾을까?
소위 말하는 명품소비를 통해서 찾는다.
명품소비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과시적 소비의 따라하기 소비버전이다.
욕망의 소비는 줄이고 가치의 소비를 늘리자.
http://cafe.daum.net/jordan777/Bm2o/597
이것에 대한 자세한 예는 이 글에 써 놨다.
욕망에 소비는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를 따라하기 시작하면 나는 없고 소비를 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그러한 것을 소비하기 위해 숨 돌릴틈 없이 일해야 한다.
좀 더 큰집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좀 더 비싼 차를 타기 위해 좀 더 비싼 가방을 들기 위해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정상이다.
그것을 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사회가 조장하고 잇으니까 말이다.
TV에서는 새로운 자동차 광고가 나온다.
내가 1년 전에 할부로 산 차의 할부금은 앞으로 4년이나 더 남았는데 새로운 차를 타야 나의 자아정체성이 생기는 것처럼 TV광고는 말해준다.
새로운 운동화를 샀는데 이미 이 운동화는 작년 이월 제품이 되어버렸다.
때에 맞춰 나는 새로운 운동화를 사야 하고 새로운 차를 타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유행타지 않는 더 비싼 차와 더 비싼 물건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물건을 샀을 때 주변의 부러움의 시선으로부터 뿌듯함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이런 체면문화에 더 익숙하다.
내가 이런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테스트가 있다.
내 수중에는 딱 18만 원이 있다.
그런데 아는 지인의 결혼식 3건이 있다.
첫 번째는 아주 부유한 지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10만 원 이하는 내지 않으며 10만원 이상을 낸다.
두 번째는 중간정도 사는 사람이며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라 부조는 5만 원 정도 한다.
세 번째는 아주 못사는 사람이며 그는 3만 원만을 낸다 하더라도 고마워 하는 결혼식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사람들 대부분은 첫 번째는 10만 원 두 번째는 5만 원 세 번째는 3만 원을 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이런 의식 자체가 없다.
그래서 1/m 해서 6만 원씩 내는 나라도 있고 어려운 사람을 더 주는 나라도 있다.
내가 과소비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가 더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비는 나를 소위 머리는 깡통이나 똥을 만드는 기계로 만든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없이 소비를 위한 생산활동만을 하다가 죽는다.
이 소비를 위한 생산활동은 아주 잘 하면 어떻게 될까?
남들이 똥을 십 수 톤을 만들 때 나는 20톤 이상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아정체성을 찾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담스미스는 교육으로부터 찾았다.
배우는 일이다.
배우는 일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공부하고 삶을 살찌우고 생각을 넓고 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까?
꼭 공부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면 입시미술 학원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그림을 배우는 것도 좋다.
그리고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인문학 책을 사서 보는 것도 좋다.
여행을 좋아햇다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여행을 가는 것도 좋다.
나중에 나는 여행을 갈 것이다.
학교 다닐 적 배낭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 때 만났던 여행전문가가 있다.
그는 여행자율화 되기도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했다.
태국의 카오산로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그는 하루 종일 먹고 수다 떨다가 자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남부 해변으로 놀러가 하루 종일 먹고 수다 떨고 잔다고 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이곳은 물가가 싸서 한국에서 3개월만 일하면 9개월은 여기서 싼 값에 놀 수 잇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것에 전제조건이 잇었다.
결혼을 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후 결혼을 했고 명품소비는 안 했지만 하루 하루를 정말 힘겹게 살아내고 잇었다.
요즘은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
아이들만 다 크면 여행을 갈 것이다.
나도 조만간 그처럼 살아보려고 생각중이다.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는 어차피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일하는 것이니 마음이 편하다.
주택이나 상가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즘 인문학 강의나 경제강의 또는 책을 보고 그 외에 분야도 닥치는대로 읽거나 본다.
다만 보지 않는 책은 자기개발서, 부동산책, 주식책은 보지 않는다.
인문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에 통찰에 관한 것인데 이것이 사람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
사람을 이해하면 시장경제를 이해할 수 있고 전반적이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매일 발전하는가?
발전한다는 것은 내가 고통스러워야 한다.
왜 그런가?
학생이 공부를 할 때 언제 제일 고통스러운가?
문제를 풀 때?
독해를 할 때?
아니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모르는 것을 알 때 이다.
언제 모르는 것을 알 때 인가?
영어는 단어를 외우고 국어는 어휘를 외우고 수학은 모르는 문제가 하나도 없이 반복해서 풀 때이다.
그 때 왜 고통스러운가?
모르는 것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영어의 독해는 단어의 조합이다.
물론 영문법이나 독해의 기술이 어느정도 완성이 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 되었을 때를 가정한다.
그러면 독해를 하거나 문제를 푸는 것은 스킬을 쌓는데 도움이 되지만 사실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실력이 느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영어단어를 외울 때 가장 많이 실력이 정량적으로 늘어난다.
국어도 어휘를 알아야 국어실력이 늘어난다.
이것이 실력을 늘리는 과정이다.
실력을 늘리는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가장 많은 발전을 이뤄낸다.
나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새로운 분야를 파고 들 때 발전한다.
그래서 전문가보다는 여러분야를 넓고 깊게 공부하는 투자자로 거듭날 때 발전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자아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또한 고통스러울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고통만을 수반하는 고통이 아닌 고통을 통한 자기발전을 이루는 고통이라 즐겁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고도 깊어질 수 있다.
갈리아니는 사람이 곧 부(富)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역량을 키울 때 부는 늘어난다.
14세기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사람들은 잘 살았다.
그런데 자신들이 왜 잘 살았는지 몰랐다고 한다.
땅은 척박하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이 지방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부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역량을 키우는데 힘을 썼다.
부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총량을 부라고 보면 안 된다.
부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총량이 늘어나면 부라고 볼 수 잇다.
물론 재물의 총량도 중요하다.
가난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재물도 늘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늘리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