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욕망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욕망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시간의 개념은 언제 생겨났는가?

산업혁명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중세시대, 조선시대의 시간은 매일 같은 날의 반복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고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왜냐하면 농노는 하루 종일 농사를 지었고 귀족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아서 식사를 한끼에 3시간씩 했기 때문이다같은 날의 반복에서 가장 존경받던 사람은 노인이다.

왜냐하면 매번 똑같은 일의 반복이 지속되니 농사라는 것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것은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은 산업혁명 이전에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존경을 받으니 권위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산업혁명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건이 모자르는 시기에서 물건이 남아도는 시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전까지는 물건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느리고 느리니 필요한 물건은 적게 나왔다.

그래서 만들면 만드는대로 팔리는 시기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며 물건은 만드는대로 팔리는 시기가 아닌 물건이 남아도는 시기로 바뀐다.

그렇게 된 이유는 기계를 통해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계는 하루에 5벌 밖에 못 만들던 옷을 하루에 몇 천벌, 몇 만벌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옷감도 기계를 통해 만들어내니 기계의 성능이 좋아지면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남아도는 옷은 자국에서 소화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이 생각한 것은 타국으로의 수출이다.

그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준 경제학자가 아담스미스와 리카르도다.

자유무역을 주창했으며 자유무역을 통해 자신의 나라에서 강한 제품을 만들어 교역을 하면 양국에 이익이 된다는 논리였다.

리카르도가 천재인 이유는 선진국이 둘 다 잘 만들어도 후진국도 이득이라는 논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서양제국은 무력을 앞세워 제조업에서 남아도는 옷감을 소비할 나라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이 식민지다.

식민지에 옷감을 팔고 그들로부터 농산물과 값비싼 귀중품을 수입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시대는 2000년대 들어서며 민족주의시대로 들어서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식민지는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독립국으로 인정받는다.

이 때 제국주의의 자본가들은 제조업의 발달로 물건은 넘쳐났다.

그러나 식민지가 없어 더 이상 팔아먹을 수 없는 제품을 어떻게 팔아먹을까 고민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욕망중 가장 강한 것은 시각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해 나가는 것이 시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의 눈이 없다면 명품가방이 필요 있을까?

아니면 커다란 집은?

눈이 없다면 내가 누울수 있는 따뜻한 침대만 원하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에서의 에피소드 중 아름다운 눈을 가진 스님에게 반한 처자가 그의 눈을 보고 아름답다 하자 그의 눈을 뽑아 그 처자에게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눈이 사람에게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막상 뽑혀 나오면 흉물스럽다는 것 말이다.

시각으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욕망을 갖게 되었는가?

시각이 얼마나 사람의 욕망을 왜곡하는가를 알 수 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밤에 마신 물이 그렇게 맛있었지만 다음날 일어나 먹은 물을 살펴보니 사람의 해골로 물을 퍼마셨다는 사실에 속이 메스꺼웠고 사람의 시각은 얼마나 인간을 간사하게 만드는지를 깨달은 것 아닌가?


자본가들은 안다.

사람들이 얼마나 시각에 약한지 말이다.

그래서 물건을 더 이상 사지 않는 사람을 위해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광고를 한다.

TV를 통해 명품의 옷과 가방, 럭셔리한 집들을 보여주며 본인들이 얼마나 허접한 옷을 입고 있고 허접한 집에 사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강조한다.

너는 너야.

옷은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이지 뚫어지면 기워서 입는 것이 옷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가들의 발상은 성공했다.

사람들이 옷을 계절별로 색깔별로 사이즈별로 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오래된 집을 버리고 새 아파트로 가야 가정이 화목해지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자본가들에 의해 꾸며진다.

자본가들이 소비자의 시각을 지배하며 과잉소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은 쿨한 사람이다.

새 제품을 쓰는 사람은 얼리 어답터라는 이름으로 추앙 받는다.

그러나 옛것을 쓰는 사람은 사회에 적응 못하는 원시인 취급을 받는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야 망가지지도 않은 물건을 사야하며 그 것을 누구나 욕망한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주입한 욕망인데도 자신의 꿈인것처럼 착각한다.


이 시대는 노인보다 청년이 각광받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물건에 적응하는 것은 청년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쿨하며 소비적이다.

그들은 새것을 잘 받아들이는 스마트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스마트폰을 사도 설명서 없이 물건에 적응하고 키보드 자판도 두 손가락으로 능수능란하게 쳐 댄다.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은 노인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된다.

산업혁명을 거쳐 스마트한 그리고 소비지향적인 사람은 청년이지 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인보다 청년이 소비지향적이고 과시적이고 개성을 강조하면 잘 먹히는 그런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청년이다.

소비하지 않고 적응 못하는 노인이 아닌 것이다.


청년이 주목하면 쿨해진다.

SNS가 유행이라면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뜨는 것이고 청소년들이 게임에 미치면 텐센트나 액티비전 블리자드와 같은 기업들이 뜨는 것이다.

젊은이가 좋아하는 명품백이 있다면 얼마나 오래 되었고 전통이 있는가보다 쿨한 이미지로 다가간다.

그래서 구찌가 뜬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내가 욕망한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현대는 아니다.

유행하는 것, TV에 나오는 것, 연예인들의 공항패션, 재벌3세의 집, 패션센스 등이 더 눈길이 가지 않는가?

그것은 고도로 계산된 자본가들의 욕망주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마치 그것은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남이 만들어준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산업혁명 이후 시간의 개념이 이 모든 것을 바꾼다.

오래된 것은 버려야 할 것 새로운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간을 좀 먹는다.

자본가들이 산업혁명 이후 지배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벌과 똑같이 가진 한정된 것도 시간이다.

남이 만들어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놀 시간이 없다.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내 모든 시간을 들여 그것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면 내 시간은 줄어든다.

그것을 사기위해 내 시간을 썼으므로 말이다.

요즘 자본가들은 시간마저 아껴준다.

쇼핑을 백화점에서 홈쇼핑으로 온라인으로 그리고 모바일로 장소와 시간을 아껴 물건을 소비하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끊임없이 소비를 위해 노동하도록 만든다.

자본가의 덫에 걸린줄도 모르고 새로운 스마트폰이나 한정판 피규어가 나오면 그것을 밤새워 줄서서 사는 내가 너무 쿨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면 무엇인가를 사고 싶다면 과연 내가 만든 욕망인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욕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라 했고 직장 다닐 때는 일하라 했다.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적이 없고 남이 보기에 이런 직업이 쿨하고 남이 보기에 이렇게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이정도 집에 살며 이정도 차를 사야 내가 쿨한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32평의 아파트에 살며 연봉이 5000만 원 이상이고 대졸이상이며 기타 등등 정신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그냥 물질적인 것으로 도배가 된다.


반면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은 1969년 공약집에 담았던 ‘삶의 질’에서 △외국어 하나 이상 가능하고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기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남들과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줄 알고 △‘공분’에 의연히 동참할 줄 알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도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비평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712705.html


5000년 전에도 나는 없었고 앞으로 5000년 후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상품을 사람들이 욕망하도록 잘 포장하고 광고하는 자본가를 잘 골라내 그 자본가의 주식을 사는 것이고 그 주식의 배당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내가 너무 물질적인가?

아니다.

이것을 모르고 물질을 얻기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이 더 물질적이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