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by 김민규

꽃은 봄과 섞인다. 봄의 온도와 그 적절한 온도의 바람이 몸을 누르고 감싸는 압력과 질감은 사람을 녹인다. 봄바람이 내 몸을 흔들고 같이 흔들리는 꽃을 보고 있으면 지난날의 어둠과 앞으로의 두려움을 잠시 잊는다.

꽃을 산다. 사라질 줄 알고 산다. 꽃은 땅에 뿌리 박혀 살아있음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조하는 것이지 뽑거나 잡아 뜯어 죽여 선물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을 어쩌지 못해 꽃을 살해해 선물한다.


꽃은 생식기이다. 생존이 곤란할 때 자손을 남기고 자살하기 위해 식물은 꽃을 피운다. 가혹한 환경을 이기고 죽음에 도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졸업식에 건넨다. 당신의 죽음과 탄생을 그 자살의 과정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자식을 낳은 엄마에게 꽃을 준다. 자신을 버린 용기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버려야 한다. 참 어른이 된다는 건 죽는 것이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길가의 연석 사이로 꽃이 피었다. 어린 아들과 젊은 엄마가 쭈그려 앉아 꽃을 요리조리 들춰보고 있다. 아들의 눈은 꽃을 빨아들이고 있고 그런 아들을 엄마의 눈이 빨아들이고 그 모습을 내 눈에 빨아들인다. 선명한 노란색이 아들의 안구 건너 시신경을 때리고 꽃의 질감이 엄지와 검지 사이를 긁고 그 향이 콧속에 닿는다. 꽃의 복합적 신호가 아이의 정서를 흥분시킨다. 이담에 아이가 커서 사랑을 알게 되면 이 아이는 꽃을 선물할 것이다.


호랑이를 알기 위해선 그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사진을 보는 걸로 부족하다. 직접 만나야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마주한 호랑이가 입을 쫙 벌려 공격성을 드러내 극한의 공포가 감은 온몸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호랑이가 뭔지 알게 된다.


꽃이 어떻게 예쁜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설명을 듣거나 글을 읽어서 이룰 수 없다. 꽃을 직접 만나야 한다. 달다는 건 무슨 뜻이냐는 어린이에게 많은 말을 하기보단 설탕을 입에 넣어 주는 게 좋은 설명이 되겠다. 예쁘다는 건 무슨 뜻이냐 묻는 딸에게 꽃을 직접 보여주겠다. 꽃봉오리의 오묘한 형태와 선명한 색은 신이 마치 “예쁨이란 이런 거야 짜식들아”라고 사자후를 발하며 특별한 애정으로 빚은듯하다.


데이터의 저장, 압축, 전송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덕분에 텍스트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네이버에 묻지 않고 유튜브를 켠다. 어린이들은 답답한 텍스트 대신 영상과 게임에 물들고 있다. 아이에게 영상을 붙여주면 엄마는 고된 육아의 사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언어는 사실을 대변할 수 없다. 사실은 이미지로 압축되고 때론 개념으로 압축된다. 압축은 선택과 집중이다. 압축 시 정보는 손실된다. 영상과 해체의 시대에 합리성과 이성과 개념은 힘을 잃고 있다. 직관과 이미지가 범람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개념적 사유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소설을 영화화할 때 영상 기법으로 표현해 전달하기 유리한 내용이 있지만 글로 표현해 얻을 수 있는 맛이 여전히 남는다. 연속물인 자연과 사회를 분절해 그 질적 차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말로써 집는 순간 진리에서 벗어나지만, 개념으로 포착하지 않은 진리는 무의 상태다. 누구도 영원히 진리에 닿을 순 없지만 진리에 다가가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회의주의적 자살이다.


누가 봐도 수긍할 만한 객관적인 사실이 있는 반면 주관성이 강한 문제들도 있다. 체제를 세우는 자들은 지나치게 우쭐대고, 체제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지나치게 주눅 든다. 답안을 뛰어넘는 답을 적는 사람은 추가 점수를 받는 경우도 있고 감정을 받는 경우도 있고 0점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때론 선생의 그릇이 학생을 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바람직한 일은 체재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초월하는 것이다. 질서를 초월하려면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


상대성이론이 나오는 날 뉴턴 역학은 휴지조각이 됐지만, 아인슈타인 박사는 상대성이론이 진리 체계를 완벽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은 진리의 그림자의 일부를 어렴풋이 곁눈질로 봤을 뿐 이 설명 체계도 머지않아 깨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론체계를 구경한 이들은 인간이 비로소 진지를 깨달았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인간은 진리를 누군가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길 바란다.


인류의 발전은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특별하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현재의 체재가 정답이며 절대불변의 진리라 믿으면 발전은 없다. 발전을 멈추면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지 못하고 분해된다. 진리와 생명은 정태가 아니고 동태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