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내겐 일이 많이 쌓이면 갑자기 다 놓고 대책 없이 사라지는 필살기가 있었다. 하루는 뿔이 나서 내일로 기차표를 갑자기 사 순천만에 갔다. 그 시절엔 매사에 짜증이 났는데 역시 돈은 부족하고 날씨는 덥고 습했다. 순천만 공원을 산책 중 보슬비가 내렸다. 땀에 젖은 몸과 분노에 젖은 마음을 비에 아주 적셔버리면 차라리 나을까 싶어 산 정상 전망대를 향해 계속 걸었다. 가는 길에 다운증후군 아들과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들키지 않고 염탐하려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의 속도에 박자를 맞췄다.
아들은 지구에 놀러 온 외계인처럼 숲을 빨아들였고 어머니는 아들을 봤다. 모자는 대화 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운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30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에는 내 생각이 닿질 않는다. 같은 길을 걸었지만 사실 나와 그들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3배 더 밀도 있게 세상을 빨아들였다.
생후 19개월 때 열병을 앓아 시력과 청력을 잃은 헬렌 켈러는 소풍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느낌을 묻곤 했다. 별 감흥이 없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놀라던 그녀는 오 분만 집 앞을 나가도 바람이 손가락을 훑고 향기가 콧속을 간질여 온 우주가 보인다.
지체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보육원에서 한 봉사자가 장애인들과 시간을 때우고 있다. 축구공을 운동장 건너편으로 멀리 차고, 지체 장애인들은 축구공을 쫓아가 줍느라 서로 다툰다. 옷이 땀에 절고 얼굴이 때에 절고 표정이 선명하다. 봉사자의 몸은 깨끗하고 향기가 나고 표정이 피곤에 절어 있다. 축구공을 쫓는 자들은 시간과 권태의 저주에서 풀려있다. 봉사자는 시간과 피로의 저주에 걸려있다.
한 지체장애인은 물병을 던졌다. 삼다수를 마시고 싶은데 누가 삼다수 병에 몰래 정수기 물을 채워서 준 것이다. 삼다수 물맛이 아님을 혀가 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집에 오는 길에 삼다수를 사 먹어 봤다. 물맛의 차이가 안 느껴진다.
박사과정 연구에 진전이 없고 애인과 헤어지고 목돈 빌려간 친구가 무소식이고 구설수에 오르고 일이 꼬이고 인생에 들인 정성의 농도에 비에 모든 결과의 크기가 귀여웠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자아가 가루나 바람에 휘날렸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더 이상 욕망이 없고, 남은 바람이 없고, 성취나 기대감도 없는데 때마침 아버님께서 정신병원에 갇혀 육 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희망 없는 삶에 한 줄기 분노로 버텨지지 않는 것들을 버텼다. 죽을 용기가 없어 아직도 비굴하게 살아있다.
어느 밤 무슨 힘이 남은 건지 화가 치밀어 노적봉으로 (안산시 소재, 2.5 km 산기슭 순환산책로) 기어갔다. 분노를 발바닥으로 보내 한 발자국씩 땅을 으깨듯 비벼 밟았다. 산길이 말없이 분노를 감당했다. 시계방향으로 길을 아작 내며 걷다 반시계 방향으로 걸어오는 사내와 스쳤다. 그 사내는 한쪽 다리가 없이 두 목발과 한 발로 길을 으깨듯 비벼 밟았다.
그 사내를 ‘구경’하러 이따금씩 노적봉에 갔다. 팔과 등의 근육이 건장하고 흰 티셔츠가 땀으로 범벅이다. 눈을 보고 싶어 얼굴을 봤다. 주변이 어두워 시선이 보이지 않다. 앞을 보는 것도 아니고 밑을 보는 것도 아닌 게 어딘가를 보고 있는데 시선에 보이지 않는 다짐이 묻어있었다.
저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사는 걸까. 나는 무슨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다리는 언제 잃은 것일까. 나는 아직 잃을 게 많아서 고민이 많은 건가. 다리가 하나쯤 없으면 삶이 명확해질까.
시한부 판정을 받은 노모와 발달장애 아들이 산책을 한다. 같이 걷던 길을 어느 날 아들이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의 두 다리가 말한다. 남은 자는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