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카페로 간다
카페를 최대로 즐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
섹시하다는 단어를 땅에 심으면 커피가 날것이다. 산지마다 커피콩이 유전적 특징을 품고 바람과 볕의 맛을 몸에 바른다. 흙과 풀, 과일의 풍미를 지닌 커피콩을 열에 덖으면 캐러멜을 덮은 견과류의 고소하고 달큰한 향미가 피어오른다. 향을 맡으면 정신이 아득하고 마실수록 혀에 인이 박혀 끊기 어렵다.
프림과 설탕을 넣은 인스턴트커피에 길들여져 공부한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마셨다. 공부를 위해 커피를 마신 건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공부를 한 건지 궁금하던 차에 큰 수술을 받은 한 친구에게 문병을 갔다. 안산 촌놈 눈에 두 시간이 걸려 찾아간 대형 병원의 위엄도 대단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커피 한잔이 온통 뒤덮는다.
친구의 형이 난생처음 들어본 ‘스타벅스’라는 곳의 ‘캐러멜 마키아또’라는 이름부터 기대감을 한 것 자극하는 커피를 줬다. 달콤함이 세포를 한 알씩 깨워 목 뒤로 넘기기가 아까워 사탕을 빨아먹듯 조금씩 핥았다.
혀를 감은 캐러멜이 달팽이관의 평형감각을 무디게 해, 세상이 도는지 커피가 도는지, 내가 도는지 커피가 도는지, 아픈 건 친구인지 나인지, 누가 환자이고 손님이고 커피인지, 연예인들은 굳이, 굳이 마약을 하는 걸까 커피를 마시지, 과연 이것이 서울의 맛인가, 미국의 맛인가, 선진 문물에 대한 사대주의가 혓바닥에 뿌리내렸다.
이후로 스타벅스에 한참 다녔다. 미국과 유럽의 생활환경이 뭔지도 모르고 막연히 동경하던 나는 스타벅스의 인테리어와 접객 방식을 마시며 후진국의 야만성에서 탈피해 보다 높은 인간성과 예술에 닿은 코즈모폴리턴적 지성인이 된 것 같은 허세에 잠겼다.
지금은 캐러멜 마키아또를 자주 마시지 않는다. 너무 달다. 에스프레소도 마시고 생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도 마시고 카페마다 시그니처라고 표현하며 웃돈을 얹어 파는 다양한 변종의 커피 메뉴들도 마시지만 처음엔 마냥 쓰고 별 맛이 느껴지지 않아 피하던 아메리카노를 가장 자주 마신다.
피곤을 속이고 빠르게 일로 몸을 구겨 넣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이 우울할 때 잠을 충분히 잔다. 충분히 자도 해소되지 않는 무력함에 잠기면 예쁘고 한가한 카페로 찾아가 커피를 입에 물고 전원을 끈다.
호화롭게 시간을 잊으면 일종의 명상 상태에 들어가 세상과 나의 분리를 잠시 해소하는 기분이다. 시간을 사치하거나, 시간을 의식하지 않거나, 시간을 잊거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술을 못 삼키는 나는 친구를 사귀거나 이성의 환심을 살 때 카페로 유인한다. 사람의 긴장을 즉각적으로 해제하는 효험은 없지만 커피 향은 제법 일을 한다. 다소 느리지만 곁으로 맴돌며 서로를 탐색할 수 있게 사람 간의 긴장감을 감싸서 녹인다. 서로를 고립하는 성벽을 허무는 마중물이 된다.
잘 차려 놓은 공간을 잠시나마 점유하는 기쁨을 위해 많게는 만원까지 하는 커피 한잔의 값을 지불한다. 정돈된 낯선 공간은 평소에 느끼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이 들게도 하고, 대화에 폭과 깊이 더하기도 하며, 치욕을 감당하느라 지친 마음에 쉼을 준다. 일탈을 꿈꾸지만 아주 떠날 용기는 없는 나는 현실로부터의 가벼운 도피를 위해 카페로 숨는다.
가지런한 공간 배열이 맛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방문할 밥집과 카페를 고를 때 인테리어에 들인 정성과 조화를 본다. 공간에 홀려 들어가고 나서는 메뉴 구성을 본다. 중심을 이루는 몇 가지 메뉴로 간단하게 차린 밥집과 카페를 선호한다. 유행을 따르는 메뉴보다 전통적인 메뉴가 주를 이루는 곳을 선호한다. 메뉴를 시키고 나서 업장의 위생상태와 접객 태도를 본다. 환대의 기조에 대한 고민이 묻지 않은 가벼운 태도와 사업주만을 위한 온갖 하우스 룰과 체류시간에 대한 압력이 명시되어 있으면 재방문이 꺼림칙하다.
발길이 자주 향하는 카페들은 주로 일층에 있다. 몸이 들뜨지 않고 땅에 붙어있어야 심리적 안정감이 든다. 거주지도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어서 등을 당에 대고 살고 싶지마는 뻗어 나는 식물을 관리하는 일이 골치 아프고 표준화된 규격으로 거래의 환급성이 훨씬 좋은 아파트의 소유를 포기하기 어렵다. 역시 편의보단 돈이다. 돈이 편의인가.
다시 카페 이야기로 돌아가서, 카페 안팎의 경계가 느슨할수록 좋다. 큰 문이 열려 있든지, 큰 창문이 열려 있든지, 접이식 유리벽이 완전히 개방되어서,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 바람이 통하고, 밖에 앉은 사람과 안에 앉은 사람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다. 콘크리트와 나무를 주 재료로 삼고 그 외의 색이 없으면 좋다. 상징적인 색을 사용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사용한 곳이 좋다. 스타벅스의 녹색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공간을 잡아먹었다면 사용자가 받는 피로감에 브랜드가 시장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엔 할 일을 미루고 기어코 카페에 간다. 습기가 주는 공기의 둔탁감에 창문과 건물과 대지를 두드리는 비의 노크, 사람들의 기분마저 가라앉아 평소보다 낮은 음조로 대화하는 대화 내용에는 삶의 관심사와 태도마저 빗방울에 묻혀 흥분하지 않고 낮게 깔린다.
비가 쏘는 햇빛과 떠도는 먼지를 다독이고, 습한 공기가 특유의 비 오는 날의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면 산만한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라앉은 마음에 모든 자극이 열리는 것만 같아 소리도 냄새도 사람들의 표정도 커피 맛도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대지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소리와 냄새가 사람들의 체취와 뒤섞여 카페 공간을 끈적하게 메우고 오랜 건물의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냄새마저 옅게 느껴지기도 하며, 필터를 뚫고 나오는 물 맛의 변화가 커피 맛에 느껴지기도 하면 하루의 분위기가 완성된다.
커피 맛의 주 요소 중 하나는 물 맛이다. 한국은 유럽에 비해 수돗물의 품질이 우수해서 커피 산업이 뿌리내리기 좋은 조건을 갖췄다. 커피 맛의 더 중요한 요소는 마시는 사람의 기분과 몸의 상태이다. 커피의 객관적인 맛보다는 때마다의 몸과 기분이 커피 맛을 결정한다. 객관성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같은 원두를 쓰게 느낄지 달게 느낄지는 몸의 염분과 염증, 호르몬과 갈증 그리고 마음 상태에 달렸다.
카페 공간의 건축적 재료의 사용과 표면 처리에 더해 내부에 흐트러진 사물이 말을 건다. 의자와 테이블, 커피 머신, 주방 집기, 식물, 스피커, 도자기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스쳐가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날마다 운영자의 기분을 다르게 좌우해서 전체적인 조화를 완성한다.
돌과 나무, 유리가 주는 물질의 단단함과 물컹함 그리고 부스러질 것 같은 구조적 취성은 시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바닥을 걸을 때 몸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피부 접촉에 의해 전달되기도 하고 소음을 튕겨내는 물성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피부가 직접 닿는 의자와 테이블은 가급적 나무로 되어서 몸의 온도를 순식간에 뺐어 가지 않으면 좋다. 플라스틱 판이나 필름으로 코팅되지 않고 재료의 물성을 느낄 수 있게 기름으로만 겉 처리를 해 놓으면 소유자는 습기와 사용에 의해 뒤틀리고 마모되지 않을까 고민스럽겠지만 세월에 묻어 마모되어 가는 마루 바닥과 가구를 보는 일은 잠시 머무는 사람에겐 즐거움을 주기만 한다.
너도 나도 새로운 물건 새로운 공간 새로운 관계만을 추구하고 금방 질려 손쉽게 교환하곤 하는데, 나는 낡고 오래된 물건과 장소를 선호한다. 가죽 지갑이나 청바지를 사서 오래 사용해 변형되고 상처가 쌓여갈수록 멋이 짙어진다.
손님으로 꽉 차기보다는 한가한 가게가 좋고, 손님이 아주 없을 바에야 차라리 붐비는 것이 낫다. 내가 있는지 주변 손님이나 점주가 모르거나 신경을 안 쓸 수 있어야 한다. 친한 사람들과 생각과 감정이 동하지 않아 사람을 멀리하다가 혼자 격리되어 있는 일이 지겨워서 일부러 붐비는 카페를 찾을 때도 있다. 차라리 말을 서로 섞지 않는 스쳐가는 남들이 더 편할 때가 많다. 복장과 태도에서 그 사람의 세상을 읽는다. 읽기만 하고 서로 개입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긴장감을 본다. 식음료의 제작을 위한 작업대와 손님이 머무는 공간의 구분이 모호한 가게로 부러 찾아갈 때엔 익명의 작업자로부터의 간결할 대화시도를 기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주로 작업대가 손님의 체류 공간과 격리되어있고 식음료 제작 태도가 정갈하며 접객이 차분하고 다소 수비적인 가게들로 발길이 향한다. 적당히 거리를 둔 접객 방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쩌다 점원과 안면이 트여 눈빛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면 조금씩 위기감을 느낀다. 스몰토크라도 시작했다가는 나의 척박한 정신세계를 들킬까 봐 움츠린다. 점원의 몸짓과 분위기에 자신의 공간과 위치에 대한 단단한 자긍심이 묻어 있으면 아름답다. 다소 무리한 손님이 나타나도 상처받지 않고 따듯하고 지혜롭게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이 느껴지면 보는 나도 덩달아 안심하고 내 일에 집중한다.
한국은 대로변과 골목, 바닷가와 산속, 심지어 외딴섬 속에서도 카페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고소득 전문직의 사람들이 선망의 직업을 정리하고 나서 나중에 카페나 하고 싶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한국에서는 카페 사장이라는 직업은 모든 직업의 최상위에 있는, 모두의 선망의 직업같이 보이기도 한다.
개인의 인격과 감정을 뭉개는 상명 하달식의 전체주의적 초고속 압축 발전을 통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부를 이뤄낸 부모들이 자신을 삶을 자녀가 겪지 않길 원해서 잃어버린 삶의 모습을 자녀에게 투영한다. 개인의 품격을 지키라는 애정을 머금고 학교에서 자유의 경계와 한계를 넘는 방종을 누리며 집단적 반지성주의에 빠져 개성을 추구하지만 누구도 개성이 없는 몰개성의 개인이 되어 취직을 거부하고 온 국토에 카페만을 차린다.
직장에서 밀려난 은퇴자도 자영업을 하고, 꼰대 직장상사의 말을 듣기 싫은 젊은이도 자영업을 한다. 젊은 여성들이 카페와 네일숍, 필라테스 센터를 차리고 어린 청년들은 술집과 배달전문점을 차리거나 배달원이 된다. 누구도 공부를 하지 않고 지성인은 조롱거리가 된다. 삼성전자 주식은 연일 하한가를 갱신하고, 소수의 전문 인력은 해외 취업에 나선다. 성별과 세대와 계층의 선명한 층 분리 사이로 바야흐로 카페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한 친구가 동네에 카페를 열었다. 질 좋은 커피를 마셔볼 호사도 누리고 유난스러운 친구의 정신세계도 엿볼 겸 자주 드나들었다. 머리는 크고 손발이 작은 (생각이 견고하고 사회성과 정치력이 작은) 친구의 잡일을 거들다가 같이 일을 했다. 친구로 십수 년 접한 자아와 작업자의 자아, 경영자의 자아 간 거리가 멀었다. 잘 안다고 오해한 포장지를 켜켜이 까며 나의 껍질과 세상의 포장지 너머를 보려 했다.
커피장이 친구는 사물로 말한다. 그의 창조물은 그의 대변인이고 자식이고 자신이다. 커피가 곧 그이니 나는 그를 갈아 마셨다. 농도가 진하지만 끈적이지 않고 깊지만 산뜻한 과일의 향미가 오렌지 주스에 콜라를 섞은 듯 입체적인 맛을 긴 잠을 깨운다. 고소한 원두를 강하게 볶은 텁텁한 커피에 적응한 혀에는 낯설었다. 쌓인 세월에 기대 마셔 적응하고 나서는 다른 커피의 맛이 비어있다.
부모-자식의 관계든, 애인 관계든, 스승-제자의 관계든, 질긴 인연의 끈이 허무하게 끊기기도 하고, 끊어진 관계가 다시 붙을 듯 가까워지다가 영영 못 붙기도 한다. 신뢰를 쌓기는 어렵고 오래 걸리는 반면 망치는 것은 한두 번이면 족하다. 한번 금이 간 관계를 회복시키기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상대를 향한 소유욕과 질투와 애정이 뒤엉키면 나를 향한 불만과 욕심이 상대라는 거울에 투영되어 상대를 보는 건지 상대를 통해 나를 보는 건지 헷갈린다. 상대를 보는 일은 나를 보는 일이다. 객관적 실체란 존재하지 않아, 아니 존재하지만 인지할 수 없어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사물과 인간의 모습을 그 존재에게 투영해 자의적인 해석만을 하고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로스터가 볶아준 커피콩이 바리스타의 손을 거쳐 한 잔의 커피가 된다. 의도한 맛을 내기 위해 콩을 고르고 섞고 볶는다. 볶인 커피 알을 얼마나 잘게 갈지 결정하고 추출 압력과 온도를 설정해 커피액을 추출한다. 태양의 위치와 기상 상황에 따라 하루 중에도 요동치는 미묘한 온도와 습도 변화에 대응하고 기계와 작업자가 가하는 우연 오차를 감안해 일정 수준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맛을 보며 세부 조건을 미 조정한다. 어느 정도의 맛과 멋에서 타협할지 갈등하는 선택의 고집이 커피 한잔에 담긴다.
작업자는 표현 욕구를 사물에 담는다. 상업과 기술과 예술 사이에서 소비자를 무리하게 속이지 않으며 이윤추구의 효율성과 작업자로서의 자존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타협하기를 반복한다. 내가 좋다고 믿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 사이 기준을 잡기가 어렵지만,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결과물로 환심을 살지 떳떳한 내용으로 어렵게 돈을 벌지 끝없는 고민의 숙제를 짊어진다.
커피는 손으로 한 알씩 따야 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자라는 환경이 까다로워 온도와 바람과 고도 조건을 갖춘 남반구의 몇 지역에서 재배된다. 문명이 뿌리내린 북반구의 선진국들에서 남반구의 저렴한 노동력을 갈아 넣은 커피콩을 갈아서 아침, 점심, 저녁에 시도 때도 없이 마시며 낭만과 여유를 누린다.
뙤약볕 아래 커피를 따는 사람과 그늘 아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거나 말거나, 과수원과 농장에 자라는 작물과 동물들의 사지가 결박되어 있거나 말거나, 예술가와 운동가가 대중과는 다른 격조 높은 감각과 도덕을 갖췄다고 착각하거나 말거나, 정부가 시민을 참여자로 만들지 않고 소비자로 만들거나 말거나, 제작자와 소비자의 마음이 분리되어 있거나 말거나, 사회에 소외와 착취가 가득하거나 말거나, 불편한 진실은 눈을 감으면 안 보이니까, 가끔은 눈을 감아도 보이니까, 커피 한잔 입에 털어 쓴 맛으로 눈을 가린다.
양반은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소비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생산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먹을 줄 알지만 치울 줄 모른다. 세상의 연결성을 잊고, 고립되어, 남의 손으로 먹고 싸고 치울수록 정신이 단조롭고 고집만 세져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정직하게 노동을 하지 않고 쉽게 자본을 획득한 사람은 노동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길을 내듯 고상함과 천박함 사이에 시끄러운 논리를 만들어 몸으로 사물을 다루는 사람을 천시하고 정신노동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유통한다. 노동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은 계층 분리를 심화하고 소득 격차를 가속하며 가상 경제를 팽창시킨다. 일하는 사람은 없고 자산의 가격만 치솟아 세상이 팽창하다가 터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