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someone in love", Abbas Kiarostam
나는 ‘척’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기도 금방 잘할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인 척하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하지만 웬걸, 연기는 순간에 솔직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치를 요했다. 이를 깨닫고 난 후 나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일상의 태도를 바꾸고 있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울고 우울하면 우울한 채로 두고, 웃음이 나면 웃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괜히' 하려고 하진 않는지 점검한다.
처음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너무 못된 것 같아서, 너무 건방진 것 같아서 싫었다. ‘이게 맞나?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헛된 짓하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도 많이 들었지만 무엇이든 도전한다는 건 의미가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방법의 정론을 떠나 계속 시도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나에게 솔직하다는 게 제일 어렵다. 그나마 글을 쓰면 솔직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좋은 방향에서- 자존감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사랑은 다양한 단어로 재조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집착, 호의, 관심, 폭력 등이다. 마치 사랑이라는 포장지에 잘 싸서 아키코를 가해하는 데에 서슴치 않는다. 내 시선은 아키코의 옆이었다. 음지의 시선과는 다른 개념으로 현장에 생생하게 존재했다. 그녀의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가 너에게 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고, 당장 콜걸을 때려치우라고, 할머니를 뵈러 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내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가해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건은 잔잔하지만 격하게 흘러간다. 아무 내용도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에 느껴지는 것은 많아서 불편했다. 콜걸이 주는 사회적 시선과 이를 소비하는 노인, 집착과 폭력을 가하는 애인, 불편한 이웃까지. 자극적인 인물구성이 불편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넘지 않는 양심적인 또는 사회적인 선을 넘나드는 그들이 오히려 더 평범해보여서 일까? 곱씹을수록 후자에 가깝다는 걸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욕구가 있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욕구와 사랑을 주고 받고 싶은 욕구. 이를 건강하게 푸는 사람이 이 영화에는 없다. 다들 건강한 척할 뿐. 자생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각자의 방법을 들이민다. 아키코는 그저 버틴다. 버티고 버티던 그녀의 삶에 타카시의 낯선 친절이 받아들여진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그녀에게 잠을 선사한다.
이들이 사랑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모두가 사랑에 의해 움직인 것은 분명하니까. 그럼에도 내 마음이 계속 불편한 것은 서로를 갉아먹는 결과가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흘러가는 대로 둬라.”는 타카시의 말이 무책임하고 허무하다. 그에게는 책임져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런 마음을 느끼는 나는 아직 사랑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나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 온건히 좋은 사랑만 하고 싶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자위하는 것 말고, 나는 진짜 사랑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