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 burton "Big fish", 2023
어른이 되어 팀버튼의 영화를 보고있노라면 어린 시절 그의 영화를 봤던 잔상이 짧게 스쳐간다. 티비 속 “가위손”과 “유령신부”,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캐릭터는 사랑스럽고 예쁘게 생긴 타 애니매이션과 달리 어딘가 기괴하고 아파보였다. 그들의 낯선 인상에 괜한 거부감이 들어 빠르게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어느정도 머리가 크고 본 “미스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이불로 눈과 입을 틀어막으면서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봤었다. -지금은 워낙에 시각기술이 발달했고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손쉽게 실제인 듯한 고도의 영상미를 가진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팀버튼의 영화는 귀여운 수준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팀버튼의 영화적 특징은 어린 아이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낯설고 기괴한 시각적 요소의 조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화는 어른들의 동화라는 수식어가 참 알맞다고 느껴진다.
어른이 되고 좀비물이나 범죄/스릴러물은 눈 한짝 정도는 뜨고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특히 작년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웬즈데이”를 정말 재밌게 봤고 오랜만에 팀버튼의 옛 영화가 보고싶어졌다.
그 중에서도 빅피쉬는 늘 “다음에 볼 영화 리스트”에 꼭 있던 친구였다. 사실 SNS나 굿즈로 많이 활용되는 수선화밭 프로포즈 장면으로 널리 알려진 포스터때문에 단순히 판타지 로맨스 영화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팀버튼의 영화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빅피쉬는 로맨스보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의 모험담이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어라? 흥미로웠다. 내 기억으로 팀버튼의 세계관에서는 처음부터 혼자인 인물이 많았고, 소위 보통의 가정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버튼 영화의 매력은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선하고 순수한 면모를 가진 주인공의 서사인데, 영화 “빅피쉬”에서는 기존의 양식에서 좀 더 대중화되었단 느낌이 강했다. 워낙에 미장센이 풍부하다보니 마치 잘 만들어진 요즘 스타일의 전시회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비록 팀버튼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느낌은 덜어졌지만 사랑스럽고 순수한 인물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명을 보는 마녀, 집보다 큰 배고픈 거인, 늑대인간 서커스 단장, 맨발의 마을 사람들, 괴짜 시인, 몸이 붙은 쌍둥이 자매, 그리고 커다란 메기까지.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아이가 되어 부모님이 읽어주시는 동화책을 반짝이는 눈으로 들여다 보는 듯 했다.
영화의 흐름은 동화 속 이야기가 잘 흘러가다가 불쑥 현실의 아들과 아버지다 튀어나오는 형식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오랜 시간동안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가는 걸 보면서 아들의 입장도, 아버지의 입장도 공감이 가거나 이해되진 않았던 것 같다. 단순히 내가 딸이어서, 여성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체면차리기가 가장 큰 문제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은 괴짜 이야기꾼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기자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진짜일까?’라는 끊임없는 의구심이 그를 기자의 세계로 끌여들였을지도 모른다. 장성한 아들은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인 허풍덩어리 영웅담을 말하는 아버지가 야속하다.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화도 내보지만 먹히지 않는다. 숨이 턱 막힌다. 내가 얼마 전에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 느낀 감정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만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는 가족이구나 싶어 괜히 마음이 서글펐다.
그래도 영화 속 아들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 곁을 지키면서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행동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세레나데”였음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아버지의 이야기가 영 가짜는 아니었다는 것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 모험담을 통해 지극히 평범하고 초라했던 당신의 삶을, 현실적인 이유로 아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들을, 어릴 적 꿈꿨던 자신의 멋지고 완벽한 모습이 아닌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괴리감을 스스로 위로하고 아들에게 멋진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병원에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의사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던 날 출장 중이라 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어. 재미없지? 물고기와 반지 같은 걸로 꾸며진 이야기와 그냥 진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나라도 환상적인 쪽을 택했을 거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인생의 회한이 느껴졌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적응해나가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이야기, 결혼하자마자 전쟁에 끌려나가게 된 이야기, 일하느라 아들의 출산을 함께하지 못한 이야기, 사랑하는 이웃들을 위해 힘쓰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스토리지만 (물론 전쟁 빼고), 그의 이야기 속에는 따뜻한 시선과 삶을 향한 긍정적인 믿음이 담겨있었다.
이 영화는 팀버튼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화해의 메시지라고도 알려져있다. 영화를 만드는 중간에 실제로 팀버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비화를 알고보니 그의 메가폰이 더욱 복합적으로 와닿는다. 빅피쉬는 가장 팀버튼다운 화해의 시도로 보인다.
우리 집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빠, 엄마, 오빠, 동생... 내가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난 정말이지 이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를 통해 여러 삶을 만나다보면 가족을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하는 마음이 서서히 해소될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왔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그들을 진정 이해하게 될진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팀버튼처럼 하나의 영화로 우리 가족들을 회자할 날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