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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ak Oct 22. 2024

폴 토머스 앤더슨 "데어윌비블러드", 2007

"There Will Be Blood", 2007



데어윌비블러드의 첫장면은 -나에게 조금 다른 의미로- 인상 깊게 다가왔다. 모래가 일렁이는 둔탁한 산맥과 함께 들려오는 공포스럽고 스산한 분위기의 OST는 단 몇 초만에 내가 있는 공간을 집어삼켰다. 노트북과 무선이어폰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탓이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나 덕분에 첫장면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꽤 오랫동안 대사없이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벌써부터 지루해져서 러닝타임이 얼마 남았는지 분단위로 들여다보았다. 2시간40분을 어떻게 견뎌야할지 막막하단 생각과 쇳소리는 장단을 맞춰 울려퍼졌다.



주인공은 손톱이 새까매지거나 말거나, 흙먼지가 옷을 더럽히거나 말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말거나 집착적으로 광물을 캤다.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신건지 시험을 내리신건지 모를 일이지만, 그에게 석유라는 생명수를 허락하셨고, 그의 인생은 180도 역전했다. 코가 약간 비뚤어진 거지같은 옷차림의 광부는 이윽고 번듯한 정장을 입은 사업가로 변모했다. 그런 그의 옆에는 항상 아들 H.W가 있었다.

사실 나는 영화 말미까지 H.W가 양아들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흙먼지와 수염 때문에 누가 누군지 분간되지 않은 여럿의 남성들이 아기를 돌보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을텐데 도통 그 이유를 단번에 찾기 힘들었다. 한 남성이 갑작스런 사고로 즉사했고, 다니엘은 아이를 데려갔다 정도의 흐름만 붙잡고 넘어갔다.

이에 따른 약간의 감상 오류가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를 농아학교에 버리다시피 떠넘기는 장면에서 다니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욕심많은 사업가라지만, ‘사업을 도와줄 수 있는 필요성을 가진’ 친동생이 나타나자마자 ‘사업을 도와줄 수 없게 된’ 친아들을 버렸다는 것에 분노했고, 그럼에도 본인이 선택한 모든 순간을 괴로워하는 다니엘을 지켜보는 것은 절망적인 마음까지 들었다.



그의 괴로운 선택은 참담한 인생의 시작이었다. 친동생은 친동생이 아니었고 아들과의 소통도 예전같지 않았다. 보란듯이 성공한 그의 삶에 유일한 친구는 술과 담배, 그리고 그의 돈을 뽑아먹으려는 밀크쉐이크같은 작자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의 노년을 마주하니 몇장면이 다시금 아프게 와닿았다. 바구니에 아이를 담고 기차에 몸을 실은 장면, 사고당한 아이를 들쳐안고 뛰며 "아가야"라고 부르는 장면, 헨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놓는 장면, 농아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껴안고 키스세례를 퍼붓는 장면, 뺨을 맞고도 혼내지 않는 장면, 헨리를 죽이고 친동생이 남긴 다이어리 속 사진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 1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최악의 욕설을 퍼붓곤 괴로워서 온 몸을 비틀며 우는 장면 등이 카메라 필름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하, 그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은 타고난 성품과 기질도 삶의 모양을 빚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어른의 정서를 만든다고 한다.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하고 여인도 곁에 두지 않고, 핏줄에는 애끓는 정을 보이고 지는 건 누구보다 싫은 그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아마 그는 어떤 이유로 가족과 결별하고  청년이 되기까지 고아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고아가 된 아이를 양아들 삼은 것도 어린 시절의 자신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전한 사랑과 믿음을 받아보지 못한 이는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어찌할 바 모른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대저택에서 볼링을 쳐도, 꾸덕한 초콜릿케이크에 비싼 양주를 벌컥벌컥 마셔도, 줄담배를 태워도 사그러들지 않는 외로움을 어쩌면 좋을까. 그의 짙어진 주름과 여전히 까만 손톱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미처 크지 못한 다니엘의 어른아이가 보였다. “바구니에 담긴 고아새끼”라며 소리치는 그의 절규를 뚫고 그저 그를 꼭- 안아주러 가고 싶었다.



내가 만약 단편적으로 다니엘을 만났다면 욕심덩어리 악마라고 욕했을 것이다. 어느정도냐면, 제3계시교의 사이비교주 엘라이처럼 그의 뺨을 갈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엘라이보다 더 세게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인생 전체를 보고나니 애석하게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신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이 이런 시선에서 출발된 것만 같다. 신의 시선에서 인간의 모습은 더럽고 추악한 욕망덩어리처럼 보임과 동시에 너무나 연약하고 작고 보살핌이 필요한 핏덩이이자 각자로서 빛나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아, 인간이란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새삼 다시 느낀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항상 연약한 사람을 선택하고 기회를 주신다. 그 예로 말주변없는 숙맥 덩어리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지도자로 선택하셨고, 워낙 눈치가 없어 형들의 미움을 산 요셉은 훗날 가뭄으로 굶어죽게 된 이스라엘을 돕는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다. 다윗은 어떠한가, 자신의 부하의 아내에게 한눈에 반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불륜을 저질렀지만 이 세대까지 회자될 유능한 왕으로, 예수님의 족보로 쓰임받게 하신다. 비록 영화는 그의 입으로 소리내어 “The end"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의 바램으로선 신이 다니엘 플레인뷰에게 석유와 돈을 허락하신 것처럼 사랑과 믿음 또한 허락해주시길, 그래서 그의 남은 여생이 부디 잘 마무리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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